종교

[스크랩] 마흔 살, 평신도

써니2022 2009. 12. 26. 02:52

마흔 살, 평신도




어줍쟎은 글이지만 어쩌다가 한번씩 여기저기 글을 올리면 삭제를 당하기 일수이고 차단까지 당하다가 어렵싸리「평신도 봉화대」cafe를 열면서 처음 써 올린 글이「서른여덟 살의 평신도」였다.
무명무실(無名無實)한 객쩍은 일인 줄 알면서도, 독거노인처럼 혼자서 하루에 수저를 단 몇 벌만 놓으면 되는 카페를 지켜 온 지 2년.......
어느덧「평신도 주일」이 마흔 살이 되었다.


공자가 이르기를 나이 40을 불혹지세(不惑之歲)라 하였다. 나이 마흔이면 아무렇게나 헤프게 미혹(迷惑)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미혹’이란 낱말을 사전에 찾아보니까
1. 무엇에 홀려 정신을 차리지 못함
2. 정신이 헷갈리어 갈팡질팡 헤맴으로 풀었다.
이제 40줄에 들어선 우리도 하느님 백성, 교회구성원으로서 불혹의 경지에 서야겠다.


세상은 변하는데 멈추고자 노력하는 것은 천주교 밖에 없다는 숙덕거림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진리는 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우리가 수구하는 것은 어이없게도 진리가 아니라 옛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교의라는 이름의 관습이 너무 많다.
그 시대에 맞게 만들어 놓은 교회법, 그것이 현세와 맞지 않음에도 자신의 위상을 유지 보호 받고 싶어서 안간힘을 쓰는 제도교회를 감싸고 있는 신자들. 그것이 하느님을 따르고 교회를 지키는 일이라고 철석같이 믿는 우리들이 아닌지......


여차하면 사제이기 대문에 용서해야 하고, 사제이기 때문에 보호 받아야 한다는 일편단심 평신도들에 둘러싸여 있는 사제가 있는가 하면, 세상에 보호 받지 못하는 사제들도 더러 있다.
시대를 읽고 옳은 것을 찾아 전해주려고 노력하는 사제들이나 묵어 쓸모없게 된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을 시도 하는 사제들이 그렇다. 그들은 교회의 이름으로 제재를 받고 귀양살이를 해야 한다.


교회는 우리 자신의 가슴 속에 있다.
우리가 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단지 건물일 뿐이다.
그러나 많은 신자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자신의 교회는 관리를 하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는 건물을 쓸고 닦으면서 주님을 위한 일이라고 착각을 하는 것은 제도교회가 신자들을 바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눈을 떠야 한다.
우리의 신앙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알아야 한다. 오로지 주 하느님을 위하는 일이 우리의 본분임을 알아야 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위해 선택한 예수님의 모델과 그 후 유다의 얼굴을 그리기 위해 찾은 모델이 같은 인물이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쇄신은, 국가나 사회나 종교까지도 쇄신의 역사는 평민, 평신도에 의해서 기록된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이유는 박물관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삶이 충만하고 꽃이 만발한 정원을 가꾸기 위해서입니다.” 라고 선언한 요한 23세 교황의 정신이 한국 교회에 구체적으로 접목될 때에 쇄신은 이루어 질것이다.


신자들의 삶에 엄청난 변화와 쇄신을 가져온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전례 개혁은 이전까지 전례에 사용되어온 공식 언어인 라틴어로는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신자들에게 명료하게 이해시키기 점점 힘들어짐에 따라 말씀이 명확하게 선포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에 따른 것이다.
이 필요성은 공의회를 준비하는 동안 전 세계 개별교회 등에서 교황청에 보낸 9000쪽이 넘는 제안들 가운데 4분의 1이 전례에 관한 문제였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그런데, 바티칸은 옛것이 더 장엄해 보이고 근엄해 보인다는 이유로 환원시킨다고 한다. 그래서 평신도는 다시 울타리를 쳐 놓은 제대 밖에서 사제의 뒤통수만 바라보며 알아듣지도 못하는 미사를 구경만 해야 할 판이다.


저, 하느님의 사회정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는 용감한 사도라고 해야 할 지 아니면 못 말리는 반골기질들의 패거리라고 해야 할 지 헛갈리는 정구사 신부님들이시어. 수신제가(修身齊家)부터 하시지요.
당신들은 당신들의 본당에서 어떤 사제입니까?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당신들 중 거개가 유별난 골통들입니다.
당신들이 속한 교구, 교회는 하느님의 정의에 합당합니까?
교회가 사회의 흑막을 질타 할 만큼 떳떳하지 못합니다.
고로 당신들은 정의의 사도는 아닙니다.
(요즘)하시는 일이 정의로운 일로 여겨집니다만 님들의 행색을 볼라치면 비위가 거슬립니다.


불교계의 비리와 음습한 곳을 파헤친 조선일보에 대하여 불매운동을 벌이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조계종에 사주와 주필이 연달아 찾아가서 개개비는 걸 보았다. 민주사회에서 언론의 힘은 막강하다. 단, 정의의 외침이기에 그렇다. 그러나 종교권력은 정의가 아니어도 막강하다.
신도들이 견강부회(牽强附會)하여 뇌동(雷同)하기 때문이다.
결국 종교권력의 힘의 원천은 평신도라는 이름의 배수진이다.


이제, 평신도위상은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과거와 다르게 새롭게 구축해야 한다.
수동적 사고에서 능동적 사고로, 기복적 신앙에서 성화(聖化)의 신앙으로, 교회 구성원으로서의 존재이기에 앞서 내가 바로 교회라는 자주적인 정신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신앙이 곧 삶이고 삶이 그대로 신앙인 신앙인이 되어야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게시된 예언직, 왕직, 사제직이 구현되어야 하는 평신도사도직이 명실상부 실존하기 위해서는 교회의 제도는 물론 평신도의 신앙의 형식과 내용의 패러다임이 근본적으로 바뀌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평신도의 위상이 영성적으로든 세속적의미로든 사제와의 위계적 관념이 파기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비로소 ‘교회에 다니는’ 수동체가 아니고 ‘내가 바로 교회’인 능동체가 가능 해 질 것이다.


교회는 전통을 신성화함으로써 심리적으로 신자의 제도 귀속성을 강화한다. 라틴어라는 낯선 언어와 같은 비일상의 요소는 권위주의의 효과를 배가시키며 동시에 신자의 주체화를 억제한다. 이러한 구조적 모순을 제거해야 한다.
본당 공동체의 구조와 체질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역성혁명을 하자는 게 아니다. 낡은 벽돌은 빼내고 새 벽돌을 끼우자는 얘기다.
지금까지 교회 내에 있는 여러 단체의 특성을 가르자면 신심단체와 봉사단체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그 이념이나 활동요강을 보면 거의 체제유지 내지 본당살림살이를 위한 것들이다. 이를테면 기업과도 같은 일종의 ‘종교사업’의 틀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교회 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평신도들의 에너지가 제도교회 유지를 위하여 활용되고 있다는 말이다.


대학의 강좌과목의 변천을 보자.
기원전에는 철학 하나였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과 현재의 대학교 강의 과목은 실로 경이로울 정도로 달라졌다. 교회는 그때나 지금이나 똑 같다.
달라져야 한다. 기존의 단체들 이외에 새로운 개념과 형식의 모임이 생겨나야 한다.
예를 들자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반, 평신도 그리스도인(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사도적 권고) 반
한스 큉 반, 교회사 반....... 등과 같은 앎을 위한 모임이나 토마스 머튼 영성 반, 성 김대건 영성 반과 같은 현대적 영성을 익히는 모임 또는 명상기도 반, 관상기도 반....... 또는 일치와 쇄신과 영성의 정보 소통을 소명으로 하는 동아리, 사랑 실천을 소명으로 하는 동아리, 환경운동을 소명으로 하는 동아리,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래 사회의 문화영성을 위한 각종 취미 연구 동아리..............





「19세기 이래로 교회에 불기 시작한 ‘세속화’의 바람은 교회를 자신들 삶의 중심으로 여기던 이들에게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게 했다.
실제로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인본주의는 역사가 더 이상 신의 섭리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며, 인간 자신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자신의 미래에 대한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는 의식을 갖게 했다.
이제 교회는 더 이상 자연과학, 철학, 도덕, 정치 및 예술의 중심이 아니라는 자각이 싹트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급격한 변화의 물결 속에서도 당시 교회는 보수적인 기본 입장만을 고수할 뿐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형편이었다. 더욱이 20세기에 들어서 세계 대전의 참상을 경험하게 된 일반 대중은 교회의 역할을 간절히 목말라 하게 된다.
그 갈증은 바로 ‘용서’와 ‘사랑’과 ‘화해’에 대한 갈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여전히 보수의 성문을 단단히 잠근 채 당시 사회 분위기와는 대조적으로 ‘평온한 교회의 분위기’를 즐기고 있을 따름이었다.............
보다 나은 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보다 나은 교회, 즉 교회가 쇄신되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발전하여 정립된다.

교황 비오 12세는 ‘사랑의 십자군 운동’으로 알려진 이 운동의 이름을 ‘M.B.W.’ (Movement for a Better World ; 보다 나은 세계를 위한 운동)라고 지어 주고 공식적으로 인가했으며, 교황 바오로 6세는 이 운동의 예언자적인 모습을 높이 평가하였다............


이러한 바탕 하에 이 운동은 교회의 모든 신자들에게 눈을 뜨게 하고 도전시키고 생동력을 주어 쇄신을 일으키게 하도록 하고 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예언적 봉사이다.
그래서 이 운동 회원들은 성령의 빛으로 시대의 징표를 식별하기 위해 반성하고 공부하는 것이다........... 」 - M.B.W.(Movement for a Better World)의 창설 동기 및 목적 중에서 -


Daum cafe '평신도 봉화대' 오우가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정중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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