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2008. 10. 18 봉화대에 올렸던 동명 제목을 일부 수정하여
2009. 11. 3 굿뉴스게시판에 게시 했다가 즉시 삭제 당한 글임 *
뉴 에이지(New Age)운동은 세기적 엑서더스(Exodus)다
현대에 있어 전 세계적으로 마치 10월 달 앞산에 단풍들듯이 번지고 있는 ‘신흥 영성 운동(뉴 에이지)’과 한국가톨릭교회의 소공동체운동을 나란히 놓고 보면 착잡하다 못해 은근히 부아가 난다.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 줄 모르는’ 우리의 교회지도자들에게 부아가 난다는 말이다.
뉴 에이지 운동의 특징 중 첫째로 꼽히는 것이 탈권위주의와 탈 제도다.
이러한 경향은 일부 반종교주의자들의 단순하고 일시적인 이탈이 아니다. 문화의 대 이동을 감당하고 있는 현대인들의 진화요 섭리의 콘텐츠(contents)다.
그리스도교 영성이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하느님을 향한 ‘자기 비움’이라면, 신흥 영성 운동은 인간 내면의 신성을 향한 ‘자아 발견’이다. 뉴 에이지 엑서더스는 자아의식의 확립이 없는 자기 비움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를 깨달은 사람들의 행진이다.
뉴 에이지 운동은 바로 종교가 세상에 대한 사명을 다하지 못함으로서 필요충분조건이 허물어지고 공급과 수요의 균형이 깨짐으로서 일어나는 세기적 엑서더스다.
그러므로 뉴 에이지가 추구하는 바는 곧 교회가 진즉에 처방을 냈어야 했고 끌어안았어야 하는 이슈인데도 불구하고 봉창을 두드리는 것도 유분수지 뉴에이지를 경계하고 적대시하고 뉴에이지 성향과 완전히 거꾸로 가는 소공동체를 아직도 읊고 있다니!
소공동체는 반 코페르니쿠스적 발상이다. 교회 중심적이고 교계 지도자 중심적이다.
양반이 하인을 부리듯 모이라면 모이고 모여서 밭 매라면 밭 매고 길쌈하라면 길쌈할 것이라는 전근대적 발상이다.
구역을 금을 그어 나누어 놓고 그 안에 사는 신자들, 별에 별 성향에다 천차만별 신분인 신자들을 모이라 하고 모여서 뭘 하란다. 될 법이나 한 일인가.
유비쿼터스(Ubiquitous) 니 노 웨이(No Way) 니 또는 디지털유목민(Digital Nomad)이니 하는 세대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인터넷만으로 동서고금의 세계와 연결된다. 이제 그들에게는 어른과 아이, 스승과 제자, 나와 이웃의 개념이 예전의 그것이 아니다. 성속이원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제도교회에 낯설어하고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신세대에게 소공동체운동이라는 게 씨알이 먹히겠는가 말이다.
교회의 뉴 에이지 운동에 대한 반응은 기껏 ‘문단속’이다.
가출을 일삼는 아들딸이 문단속만으로 해결되는가? 문짝이 허술해서가 아니라 집구석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저들은 교회가 미쳐 채워주지 못하는 새시대의 영성의 허전함을 메꾸기 위하여 떠나는 사람들이 아닌가! 문단속이 아니라 저들의 허기를 채워 줄 수 있어야 한다.
뉴 에이지운동(영성)이란 어떤 것인가. 그리스도교 영성이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하느님을 향한 자기 비움이라면 뉴 에이지 영성은 인간 내면의 신성을 향한 자아발견과 자기개발에서 찾는다.
따라서 저들은 초월적인 존재에 복종하고 집단의 구속을 따르는 종교교단과 같은 조직에 속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이다. 환언하자면 스스로 자아영성개발의 깨침이 없이 제도교회의 교리나 가르침에 피동적으로 추종하는 것만으로는 하늘나라의 자유와 행복을 얻기가 어렵다고 믿는 것이다.
교회는 이것이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세기적 패러다임의 대 전환이라는 현실을 냉엄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중세가 신 중심적 세계관의 신본주의로서 신앙의 우위, 제도교회의 절대성, 사회적 질서의 원리로서 교도권이 강조 되었다면 근대로부터 인간 중심주의가 발전하여 이성의 우위, 자유의지와 합리주의가 뿌리를 내린다.
그러다가 드디어 과학의 눈부신 발전과 더불어 나타난 포스트모던이즘은 탈권위적, 탈 제도적 엑서더스를 일으키고 다원적 의식을 열어 제치고 제도교회로부터 화석이 되어버린 영성의 부활을 위한 반작용이 뉴 에이지 운동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뉴 에이지에 대하여 업신여기거나 박대할 것이 아니라 이를 찾아가는 현대인 그리고 교회를 떠나 이곳으로 찾아가는 신자들의 희구를 우리가 충족시켜 주어야 할 당위적 책임과 의무가 있다.
그러나 교회는, 2천년동안 온갖 권력에 굳어버린 교회는 쇄신될 기미가 전혀 없다는 데에 비극이 있다.
스스로 주체 할 수 없을 정도로 비든 해 지거나 스스로 소통 할 수 없을 정도로 경색되어 버린 생명체는 종말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하늘아래 별자리가 돌아가듯 세상은 바뀌는데 양반들은 대청마루에 높이 앉아 방귀나 꾸면서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면서 소공동체니 통합사목이니 씨나락 까먹는 소리만 하고 있다.
성심수녀회가 전파하고 있는 “예수마음 호칭기도‘는 전통적인 한국 불교의 선(禪) 명상법을 가톨릭 명상 수련법의 일부로 수용하여 가톨릭적 영성으로 토착화시켰다. 근래에 청년들을 중심으로 형식과 제도에 얽매이지 않은 초교파적인 ’떼제(Taize) 공동체‘와 떼제 기도 영성에 대한 관신도크게 일어나고 있다.
뉴에이지운동을 무조건 백안시하고 이단시할 것이 아니라 무언가 헛헛해서, 방안에는 먹을 것을 찾아봐도 없어서, 밖으로 요깃거리를 찾아 나선 것이라고 여겨야 한다. 지병이 좀체 낫지 않아 잠시 다른 곳으로 피접을 나가는 것이 뉴에이지 운동이다.
문단속을 하기 이전에 요깃거리를 집안에 만들어 놓자는 것이다.
권오상 Red Sun / Arario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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