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스크랩] 가톨릭교회와 세속주의 │ "지금 여기" 9월 좌담회

써니2022 2008. 8. 22. 19:18
가톨릭교회와 세속주의 │ "지금 여기" 9월 좌담회
일  시 : 2007년 9월 4일 오후 2시
장  소 : 우리신학연구소 회의실
주  제 : 가톨릭교회와 세속주의
토론자 : 김정대 신부 (예수회)
             정중규 (인터넷카페 어둠 속에 갇힌 불꽃 지기, 한국직업재활학회 사무국장)
             경동현 (우리신학연구소)
             아침이슬 (요즘 가톨릭교회의 보수화된 분위기를 고려할 때,
                        평신도로서 느끼는 두려움 때문에 실명을 밝히지 못함을 호소하여,
                        닉네임을 사용하였다-편집자)
사  회 : 한상봉 (본 언론 편집국장)
사회자 : 귀한 시간을 내서 참석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처음에는 ‘가톨릭교회와 상업주의’라는 주제로 좌담회를 기획하였는데, 김정대 신부님께서 ‘상업주의’하니까 떠오르는 것이 없고, 오히려 세속주의가 더 맞는 것 같다는 의견을 미리 주셨습니다. 생각해보니, 제 생각에도 그게 더 적절한 주제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폭 넓게 가톨릭교회와 세속주의에 대해서 다루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주제들에 관하여 패널들이 바뀌더라도 구체적으로 심도 있게 다루는 좌담회를 계속 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신앙인으로 살다보면, 현실적인 요청과 복음적인 요청 사이에 충돌이 생기는 것을 많이 경험합니다. 이러한 갈등을 해결해갈 수 있는 길이 모색되어야 하겠지요. 먼저 세속주의에 대해서 김정대 신부님이 개념을 좀 정리해 주시기 바랍니다.
 
거룩한 세속화, 비루한 세속주의
김정대 : 제가 알기로는 세속화와 세속주의가 다릅니다. 예수님의 육화사건은 하느님께서 세속에 들어오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 사랑하는 피조물들을 어떻게 구원으로 이끌어갈지 예수가 먼저 보여주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세속화라는 것은 교회가 세속에 적응하면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과정이랄까, 따라서 가치중립적인 개념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우리 복음이 세속화라는 과정을 겪지 않으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음을 생각할 때 그 자체는 긍정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세속주의는 우리가 세속화를 하면서 세속의 이념을 따라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경계를 해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권위와 권위주의를 구분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권위가 인정될 수 있는 사회는 좋은 사회입니다. 그런데 권위주의라고 하는 것은 가장 높은 사람의 권위만 인정되기 때문에 밑에 있는 사람은 억압을 당하기 마련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그 막강한 권위를 차지하기 위하여 노력하게 되기 때문에 굉장히 부정적입니다. 그런 식으로 세속화와 세속주의도 구분해서 사용해야 합니다. 여기서 교회가 세속주의에 물들어 있는 것은 큰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상업주의가 득세하는 법이지요. 권력문제도 그렇습니다. 권력을 추구하는 교회도 세속주의에 연관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또 뭐가 있을까? 그런 식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회자 : 성경에서 비유로 표현하듯이, 누룩이 밀가루반죽을 발효시켜 빵을 만들듯이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을 복음으로 발효시켜 변화시키려면 먼저 밀가루 반죽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렇게 밀가루 반죽 속의 누룩처럼 되는 것이 세속화라고 한다면, 누룩의 특성을 잃어버리고 밀가루와 똑같아 지는 것을 세속주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침이슬 : 그런데 세속이라는 것이 원래 어떤 의미인지 먼저 분명히 알아야 될 것 같은데요? 성과 속의 의미에서 세상 사람의 속된 모습을 세속이라고 하는 것인가요?
김정대 : 일반적으로 그렇게 부정적으로  사용합니다. 하늘과 땅을 나눌 때 땅을 굉장히 부정적인 것으로 취급되죠. 하지만 그렇게 구분하다보면 하늘과 땅의 공백을 메우는 것이 힘들어집니다.
사회자 : 성과 속을 서양에서는 이원론의 시각에서 구분해서 사용하지요. 거기서는 속의 영역과 성별된 영역을 구분하지요. 이를테면 얼마 전에 교황님이 자의교서를 발표하면서 라틴전례를 허락한다고 했는데, 지금도 오래된 큰 성당엘 가면 제단과 신자석 사이를 가르는 목책이 있지요. 이처럼 성과 속 사이에 금을 긋고 공간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신부님이 말씀하시는 건강한 교회의 세속화라는 것은 세상을 거룩함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것이라고 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느님이 활동하시는 발판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발판을 속되다, 천하다, 라고 이야기 하는 것은 옳지 않지요.
아침이슬 : 세속화를 이야기 할 때 경계해야 할 것이 있는데, 자칫하면 우리가 성과 속을 가르게 된다는 것이지요. 일반적인 신자들은 보통 천국과 지옥, 선과 악, 천사와 사탄을 이원론적으로 나눠서 생각합니다. 얼마 전 미국에서 피정강의 중에 제가 장소적인 개념의 지옥이란 없는 것이고 우리에게 이미 와 있다는 천국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가 바로 지옥을 느끼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빛과 어둠을 예로 들어 빛은 ‘있는 개념’이지만 어둠은 ‘빛의 부재상태’일 뿐 ‘없는 개념’이기에 빛과 어두움은 상대개념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로, 악 또한 ‘선의 부재상태’일 뿐 실재하는 개념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한 신자분이 반발했는데, ‘악이 없다면 우리가 교회에서 배운 것은 다 뭐가 되느냐?’라고 항의한 적이 있습니다. 강의가 끝나고 젊은 신부님이 웃으면서 제게 말하길 ‘실재 교회에서 주교의 허락을 받아 구마예식을 하고 있기에 악의 세력이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정통교리인데, 그런 것이 없다고 말하면 혼란이 오지 않겠느냐’라고 했지요. 나는 교포사회라는 특수한 환경 속에서는 신자 계층들 간의 파벌문제가 심각하고, 자신이 싫어하는 집단은 사탄의 세력이라고 여기는 것을 다른 측면에서 바라보게 도움을 주고 싶었지요.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無無明(어둠이란 없는 것이다)을 소개하며 나와 다른 이웃을 너그럽게 받아들이도록 유도한 것인데 문제가 된 것이구요. 하나 더 좀 분명히 이야기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우리는 문화적인 측면에서 통속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세상과 통교를 한다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말이지요.
김정대 : 통속은 세상과 통하는 것이고 세속화라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통속주의는 세상을 쫓아가는 주의이기 때문에 부정적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침이슬 : 민중신학에선 모든 진리가 통속(通俗)에서 오는 것이라고 봅니다. 지금까지 교회가 부정하다고 여겼던 것을 끌어안고, 예수님이 그런 부정한 계층을 위해서 세상에 오셨음을 회복시켜주는 것이죠. 우리는 보통 세속을 말할 때 무조건 부정적인 의미로 받아들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교육을 받아왔기 때문이지요.
 
정중규 선생
 
광야, 곧 세속도시의 끝이나
성문 밖 결국 변방에서 외치는 소리를 온 몸으로 지니고 증거 할 때,
속된 표현이지만 세속주의에 물든 우리의 눈이 뒤집혀질 때,
비로소 교회는 참된 교회로 자리매김하면서
사회의 복음화 곧 구원도 이룰 수 있으리라.
 
사회자 :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많은 것이 변했습니다. 그 전에는 교회가 세상 위에 있다고 했는데, 여기선 성별된 영역이 따로 있고 세상은 항상 교화의 대상이었지요. 하지만 공의회 이후에 교회가 세상 안에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쇄신의 대상에 교회가 포함되며 교회도 변해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지요. 교회가 내적으로 갱신되어야 하고 변화된 모습으로 세상에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트리엔트 공의회가 말하는 것과 다른 입장이죠. 그런 측면으로 본다면 누가 누구를 성스럽다, 속되다, 라고 이야기하기 힘듭니다. 또한 우리가 육화신학을 갖고 있는데, 실제로 육화라는 것은 거룩하신 하느님이 속된 세상에 와서 속되게 살다 가셨다는 것입니다. 즉 세상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셨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성과 속의 구별보다 중요한 것은 세상 안에서 교회와 신앙인들이 어떻게 복음적으로 사느냐 하는 문제이지요. 그런데 교회가 복음적 긴장을 놓쳐버리게 되면 이른바 세속주의로 가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교회의 세속주의라는 것은 교회가 세상과 아무런 차이도 없이 세상의 주류세력이 갖고 있는 가치관을 그대로 갖고 가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이 사탄에게 유혹받았던 부와 권력과 명예라는 3가지 문제를 교회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편 복음적 긴장 속에서 복음적 식별을 끊임없이 유지하면서 살려고 하는 것을 세속화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아침이슬 : 개념으로서가 아닌 가치로서의 성스러움이 속을 끌어안는 내용을 잘 표현해 줄 그런 용어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세상 안에 어디에나 성스러움이 깃들어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외면한 채 가치가 덜한 속된 것을 지향하고 추구하는 것을 제대로 지적해 줄 수 있는 개념이 필요하다는 것이지요.
정중규 : 제2차 바티칸공의회 사목헌장에 보면 89항에 "교회는 사회 한 복판에 참여해야 한다."고 단언하고 있습니다만 그러나 이 때 교회가 참여해야 하는 그 ‘한 복판’ 곧 중심부는 세속적 관점에서의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전혀 반대되는 최변방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담지자로서 교회는 또 하나의 다른 중심부를 만들어야 한다고 보는 것이지요. 비록 몸은 사회 속에 있지만 복음적 가치관을 흔들림 없이 지녀야 할 것이며, 특히 광야, 곧 세속도시의 끝이나 성문 밖 결국 변방에서 외치는 소리를 온 몸으로 지니고 증거 할 때, 속된 표현이지만 세속주의에 물든 우리의 눈이 뒤집혀질 때, 비로소 교회는 참된 교회로 자리매김하면서 사회의 복음화 곧 구원도 이룰 수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그런데 세속주의에 매몰되어 세속적 가치관을 아예 자신의 것인 양 신주 모시듯 하고 살아가고 있는 작금의 우리 현실이 참으로 염려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기도의 효과, 정액제 패키지 미사 봉헌
사회자 : 그 이야기를 하면서 생각나는 대목이 있습니다. 최근에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대학 진학을 앞둔 수험생을 둔 어머니가 어느 성지에 기도를 하러 갔는데, 103일 기도를 해야 한다더군요. 그리고 미사 한 대당 1만원씩 계산해서, 103일이니까 103만원을 내고 등록을 하면, 미사 할 때 신부님께서 그 사람들을 위해 미사봉헌을 올리신다고 하더군요. 일종의 정액제 미사봉헌인 셈이죠. 영 마음이 내키지 않아서 등록을 하지 않았는데 미사 시간에 신부님이 모두 00명의 아이들을 위해 미사를 봉헌한다고 말할 때는, 그 숫자 중에 자신의 아이가 포함되지 않았음을 생각하며 마음에 아프게 걸리더랍니다. 이 마당에서 사제는 강자이고, 수험생을 둔 어머니들은 약자인 셈이죠. 어미 마음이라는 약한 고리를 잡고 돈을 요구하는, 그것도 정액제 패키지 미사를 보면서, 모든 교회 관행이 그렇지는 않겠지만, 뭔가 교회가 잘못되어 간다고 느껴집니다. 신앙인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주춤거리게 됩니다. 복음의 가치와 현실적 가치 사이에 충돌을 일으키는데 선뜻 복음을 선택하기가 쉽지 않으며, 사제들 역시 복음보다 현실적 이해관계를 거머쥐라고 요구하는 셈이니, 참 답답한 노릇입니다. 물론 성지개발을 위해 많은 돈이 필요하고, 그 돈을 모으려니 갖은 방법을 다 쓰는 거지요. 그러나 아무리 취지가 좋아도 방법이 틀리면, 카인의 제물처럼 하느님은 그 사제의 공덕을 받아들이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이는 중산층 교회가 지닌 은총과 걸림돌 중에서 걸림돌만 취하는 격이지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침이슬 : 저도 정액제 후원제로 개발되고 있는 성지를 알고 있어요. 거기는 아기를 못 낳는 여자에게 특효가 있다고 알려져 있고 구좌 당 금액이 당연하게 정해져 있읍니다. 한 사람이 여러 구좌를 하는 것이 일반적이고요. 성지개발을 위해서이고 특별히 성모님이 원하시는 땅이 있기에 다 사야하는데 여러분이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렇게 후원사업에 동참하고 정해진 미사와 기도를 드리면 못 가졌던 아이를 갖게 된다고 소개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기를 낳은 사람이 아이를 데리고 와서 간증하는 경우도 있고 홍보용 리플렛에 사진과 함께 소개되기도 합니다.
사회자 :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하느님과 인간이 거래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돈을 내고 하느님은 인간의 세속적인 요구, 말하자면 치병, 건강과 대학 합격 등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흥정하자는 것인데,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왜곡되어 거룩함에 대한 생각조차 왜곡되어 버린 것입니다. 즉 복채에 따라서 효험이 결정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우리의 요청 너머에 계신 분이라서 당신이 주고 싶으셔야 주는 것입니다. 은총이란 것이 인간이 요구한다고 마구 주어지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이런 흥정의 태도는 가톨릭교회의 공식 교리마저 부정하는 것인데, 교회 안에서 너무 일상화 되어서 문제의식조차 없는 게 큰 문제입니다.
김정대 : 문제죠. 하느님에 대한 인식만 왜곡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조건에 대한 왜곡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구름위에서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무슨 이야기냐 하면, 인간의 조건 자체가 나약하므로 살면서 고통을 경험하기 마련인데, 사람들은 그 고통을 건너뛰기 위해서 돈을 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능합니까? 어떤 사람은 가능할지도 모르죠. 하느님이 그 사람과 거래를 하면서 “그래 너와 거래가 성사되었다.” 한다든가 혹은 사람이 하느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셨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서 거래에 대하여 만족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거래에 실패하여 하느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하고 실망을 하기도 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의 조건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하느님을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의 삶과 조건을 잘못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저도 사실 수험생 아이들을 위해서 기도를 해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내가 기도해서 좋은 학교 간다고 생각하지 말고, 용기내고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라고 말입니다. 나는 수험생을 위해서 시험에 가까운 주일에 미사를 봉헌하지만, 이 기도가 어떤 의미인지 명확하게 이야기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기도를 했기 때문에 합격하리라 믿으라는 것은 유치한 생각입니다.
아침이슬 : 수험생 아이들을 위해 기도할 때, 그분이 날 도와줄 수 있는 있는 것은 평안함을 잃지 않으면서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함께 해 주시는 것이며, 어떤 결과라도 그분이 함께 하신다면 받아들이겠다는 용기를 잃지 않게 해 주시는 것이지요. 설령 내가 원치 않았던 결과 앞에서 고통스럽더라도 함께 하시는 그분께 의지하여 이겨낼 수 있고 그분과의 관계가 흐트러지지 않음으로써 고통 중에도 기쁨을 잃지 않도록 하는 것이지요. 제 이웃 본당에서 진행되는 <수험생 부모를 위한 9일기도와 미사>에서 지난 해 우연히 부모님들 표정을 보았는데 어떻게 해서든지 내 아이가 붙게만 해줬으면 하는 그런 내용 밖에는 없어 보여 안타까웠어요. 교회가 그런 것을 유도하고 있다고 보이기도 하고요.
김정대: 그러면 하느님도 굉장히 애매해지지 않겠습니까? 입학정원은 정해져 있는데 어떻게 누굴 합격시켜야 할까요? 그것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문제지만 사실 우리나라가 웃기는 사회죠. 우리나라 교육제도만큼 황당한 게 없는데 그런 것을 먼저 바꿔줘야 합니다. 우리 카페 위층이 학원인데 -김정대 신부는 인천 동암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쉼터인 ‘삶이 보이는 창’을 운영하고 있다-편집자), 밤 1시가 넘도록 불이 켜져 있기도 하죠. 말이 되질 않아요. 그런 것을 바꿔주는 것이 사제의 역할입니다. 거기에 편승해서 정액제 미사를 말하는 것은 문제죠.
김정대 신부
하느님도 굉장히 애매해지지 않겠습니까?
입학정원은 정해져 있는데 어떻게 누굴 합격시켜야 할까요?
그것을 그런 식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문제지만
사실 우리나라가 웃기는 사회죠.
우리나라 교육제도만큼 황당한 게 없는데
그런 것을 먼저 바꿔줘야 합니다.
 
아침이슬 : 요새 베스트셀러인 <만들어진 신(원제 The God Delusion/리처드 도킨스 저)>이란 책을 보면, 입원중인 환자를 위한 기도효과 실험 이야기가 있어요. 당사자가 모르게 기도를 해주고 나서 기도를 받은 사람들의 상태를 검사해 보니, 기도를 안 받는 사람과 전혀 차이가 없었다고 합니다. 또 하나는 자신을 위해 누군가 기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해 주었을 때는 오히려 환자들의 상태가 나빠졌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기도를 받았기 때문에 당연히 좋아져야 한다는 부담과 스트레스를 느꼈을 수도 있고, 한편으로는 ‘기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왜 좋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스트레스와 부담을 느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임상조사는 기도는 받는 사람이 아니라 하는 사람 자신에게 좋은 것이라는 것을 확인한 셈이지요.
사회자 : 과학적으로 실험을 했다고 하는데, 저는 그런 실험 결과가 신빙성이 없다고 느낍니다. 자녀를 위해서 어머니가 기도를 하고 있다고 말을 해준다면 강박관념 때문에 아이가 부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생각 때문에 오히려 안정감이 생겨 좋은 결과가 나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침이슬 : 물론 한계가 있긴 해요. 실험 대상이 입원중인 환자로 국한되었으니까요. 뭐 다를 수도 있지만 앞의 결과, 즉 본인이 모르는 상황에서 기도를 한 것이 아무 차이가 없다는 것은 생각해 볼 문제입니다. 기도는 상대편의 고통을 알고서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나 자신 때문에 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지요.
사회자 : 일리는 있지만 좀 위험한 생각이기도 합니다. 내가 모르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 했을 때 효험이 없었다는 결론에 집착하면, 이것은 성인들의 통공 교리에도 걸리고 교리와 신학적으로도 걸리는 것이 너무 많아요. 꼭 약발이 붙지 않더라도 보이지 않는 사람을 위하여 기도를 하는 것은 좋은 것이고 실제로 기도를 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좋은 현상입니다.
아침이슬 :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그 책은 굉장히 많은 사람이 읽고 있어요. 저는 우리가 그런 생각을 따라가자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런 흐름도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죠. 효과만 있다고 여겨지면 정액제라도 활용하려는 일선 신자들의 상황과 대비시켜 보면 너무 상반된 결과 아닌가요?
정중규 : 기도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역시 현대 사회의 가치관에 영향을 받은 세속주의적 신앙관에서 비롯되지 않았을까 생각이 드는군요. 예를 들어 우리는 교회 다니는 것조차 이해타산을 따지는 시대에 살고 있지요. 그리하여 사제들의 강론에서조차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라, 너에게 유익하니! 착한 일을 많이 하라, 너에게 이로우니!” 이런 식이 되니, 어찌 무상성(無償性)인 하느님의 사랑과 그에 대한 참된 신앙을 심어줄 수 있겠는가! 가히 한숨만 나옵니다. 그리하여 효과가 곧바로 나타나지 않는 신앙은 탐탁지 않게 여기게 되고, 자연스레 즉발효과 만사형통식의 신앙관이 폭발장세를 이룰 수밖에 없게 되는 안타까운 현실인 것이지요.
사회자 : 기도의 내용도 문제죠. 방법에 돈이 개입되는 것도 문제지만 대학에 붙게 해달라는 주문 자체가 문제가 된다는 것이지요. 기도라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하느님과 나와의 통교라는 봅니다. 내가 먼저 뭐 좀 해주쇼, 하고 뇌물을 먹여 청탁하는 것이 아닙니다. 청원 기도라는 것이 있지만 청원기도도 하느님과 나와의 통교 안에서 위해 주고 싶은 마음을 청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무엇인가를 해달라고 하는 것, 윽박지르듯이 하는 기도는 아닙니다.
아침이슬 : 그렇지만 신자들의 80-90%는 아니 그 이상이 그렇게 기도합니다. 내 이기심, 내 욕심을 채워주었으면 하는 방향으로 기도를 한다는 것입니다.
사회자 : 레지오 마리에 교육을 하면서 마리아 신심에 대해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우리가 하는 묵주기도는 대개 지향을 가진 청원기도입니다. 이 지향이란 게 대부분 무엇인가를 해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린 아이일 때는 어머니에게 해달라고 떼쓰는 것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러나 어른이 되었을 때도 어린아이처럼 끊임없이 달라는 기도를 하면 아직 철이 안 든 신앙입니다. 어른다운 기도는 어머니이신 성모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성모님은 결국 아드님이신 예수님이 바라시는 것을 원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분을 거룩한 어머니라 부르는 게 아닙니까? 결국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신 이웃사랑을 잘 할 수 있도록 청원기도를 해야지 어른다운 기도라고 할 수 있겠죠. 자기중심적인 기도가 일반화된 기도방식이라는 사실은 곧 우리 신앙이 아직도 유아기적인 신앙에 머물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찌 보면 교회가 아직도 이런 신앙을 신자들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죠. 그리고 그것을 통해 이득을 취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봐야 합니다. 하느님을 빌미로 자기가 하고 싶어 하는 것을 한다고 말할 수도 있죠. 성지를 개발해서 자기 명성을 날리거나 자기만족에서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제도 자기 자신을 식별할 필요가 있어요. 끊임없는 식별, 정답을 쉽게 못 찾더라도 고민을 계속 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잘못에 덜 빠질 수 있죠, 또 어린아이처럼 되면 결국 세속주의로 가게 됩니다.
아침이슬 : 그래요, 기도가 세상의 흐름처럼 조건부식이고, 정말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으면 아무렇지 않아야 하는데, 불안 때문에 정액제 패키지 신앙이라도 확보를 해두려고 하죠. 이른바 세속주의가 우리 교회 안에 깊숙히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른들의 삶에서 보고 배운 대로 살아가기 마련입니다. 미사참례를 하고 나오면서 어떤 어머니가 아이에게 “너 영성체 했어?”라고 묻는 말에, 중딩이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하더라니까요. “엄마는 날 짱구로 아나? 봉헌금을 냈는데 내가 왜 그걸 안 타먹어?”(웃음)
 
미사참례를 하고 나오면서
어떤 어머니가 아이에게 “너 영성체 했어?”라고 묻는 말에,
중딩이가 엄마에게 이렇게 말하더라니까요.
“엄마는 날 짱구로 아나? 봉헌금을 냈는데 내가 왜 그걸 안 타먹어?”
 
김정대 : 미사 예물을 못 내서 봉헌미사를 못하는 신자들도 있어요. 그러면 나는 이렇게 말하죠. 봉헌금을 내지 못했어도 미사 때 그런 지향으로 드리면 된다고.
아침이슬 : 교회지도자나 전례를 인도하시는 분이 신부님처럼 정직하게 감사한 만큼 돈을 내는 것이라고, 돈을 내지 않아서 은총을 못 받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를 해줘야 합니다. 사람의 심리를 빤히 알고 있기에 그렇게 하면 많은 사람들이 돈을 안 낼까봐 걱정이 되어서 그런 말을 못하는 것이 현실이지요.  ‘내가 어떤 마음과 지향으로 미사를 드리는가’ 하는 것이 미사예물보다 중요하다고 이야기를 해줘야 해요. 그런 당연한 안내를 일부러 안 한다면 직무유기입니다.
김정대 : 미필적 고의에 의한 직무유기라고 할 수 있죠.
아침이슬 : 교회가 확실하게 자신 있어야 하고 정직해져야 합니다.
정중규 : 사실 교회의 세속주의와 교회의 중산층화는 특히 한국에 있어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고 봅니다. 한국의 가톨릭교회 안에서 우리 사회의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이 머물 공간을 잃어버린 지 벌써 오래전부터라고 생각됩니다. 교회 시스템 자체가 어느 새 가난한 이들이 참여하거나 활동하지 못하게 되어가고 있으며 사회의 세속적 잣대가 그대로 교회 안에서도 통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교회의 중산층화, 그 현상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이처럼 교회의 세속주의화와 맞물려 함께 상호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진행되고 있기에 그 현상이 그야말로 악성(惡性)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사회적 부의 척도가 교회 안에 그대로 적용될 때, 교무금이나 미사예물조차 마음껏 바칠 수 없는 가난한 이들이 교회 안에 마음 편히 머물 수 없게 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사실이겠지요. 곧 사회에서의 소외현상이 교회에서도 그대로 이뤄지고 있다 할 수 있겠습니다.
사회자 : 그런 것과 교회가 중산층화 되는 것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중산층 신자가 교회의 세속주의를 부추기는가
아침이슬 : 그러다보면 자연히 미사예물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낼 수 밖에 없고, 돈을 잘 내는 사람이 미사에 자주 나오고, 결국 그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도 기득권화 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어요.
김정대 : 교회가 교무금이나 주일헌금에 아예 관심이 없을 순 없습니다. 그리고 아파트가 밀집된 본당에 가면 교회 수입이 전혀 다릅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 같은데, 1995년인가 가톨릭 신문이랑 평화신문에서 봤는데 그 당시 분당지역이 있었는지 기억이 잘 나지는 않지만 강남지역의 어떤 본당은 신자 비율이 지역인구 대비 15%를 넘는데, 영등포나 가난한 지역은 5%를 겨우 넘었습니다.
아침이슬 : 제가 기억하기로는 주민 가운데 가톨릭 신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2006년 4월 서초구 12.8%, 강남구 13.5%, 강북구의 경우 6.5% 정도라고 합니다.
김정대 신부 : 같은 구 안에서도 본당마다 또 다르죠.
아침이슬 : 강서구의 어떤 본당은 주민 대비 신자비율이 18% 정도가 되는 곳도 있습니다. 특수한 경우이긴 한데, 일산이나 분당이 생기기 전에 연예인을 포함한 중산층이 밀집된 신흥 주거지역이었기에 본당 분가를 이미 4~5 개나 했고, 더 이상 나눌 수 없는 좁은 지역 안에 신자 중산층이 밀집해 있지요.
김정대 : 안타까운 것이 교회의 무게중심이 돈이 있는 데로 몰린다는 것이지요.
아침이슬 : 가난한 안동교구는 신자비율이 4% 정도입니다. 결국 가톨릭교회는 교회의 소명인 가난이라고 하는 소명을 잃고 도시민 중심, 고학력 중산층 중심의 공동체가 되어버렸고 선교도 돈이 많은 곳에 집중되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김정대 : 그런 것을 의식할수록 가난한 사람들에게 교회가 가야 하는데, 도무지 에너지를 주지 않는 것 같아요.
경동현 : 통계청 2005 인구센서스에 따르면 신자가 굉장히 뻥튀기 된 것을 감안하더라도 서울시내 웬만한 구는 신자가 20%가 넘는 것으로 나옵니다. 강남 서초구를 보면 개신교, 천주교, 불교 순입니다. 서초구는 천주교가 33% 정도 된다. 다른 구에 비해서 약 10% 정도 높게 나오고 있습니다.
아침이슬 : 우리 교회에서 자체 조사한 것을 보면 서울교구 전체 신자비율을 10% 정도로 보고 있는데, 강북보다 상대적으로 잘사는 강남 쪽에서 신자비율이 훨씬 높게 나온다는 것입니다.
한상봉 이시돌
지금처럼 평신도들의 발언권이 강해진 적이 없다.
신자들이 먹고 살만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사제가 뭐라고 해도 기죽지 않는 편입니다.
그래서 평신도들의 자율적인 영역과 발언권이 높아지고,
교회의 민주화라는 측면에서
성직주의를 약화시키는데 기여하는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사회자 : 중산층이 많이 들어오는 것이 교회에 두 가지 측면에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봅니다. 사실 지금처럼 평신도들의 발언권이 강해진 적이 없다. 신자들이 먹고 살만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있기 때문에 사제가 뭐라고 해도 기죽지 않는 편입니다. 그래서 평신도들의 자율적인 영역과 발언권이 높아지고, 교회의 민주화라는 측면에서 성직주의를 약화시키는데 기여하는 측면도 있다고 봅니다. 또한 요즘 신자들을 보면 사제를 도와주는 협력자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합니다. 자신을 사제를 봐주는, 보살펴 주는 존재로 바라보는 것은 예전처럼 평신도가 무조건 사제를 섬기지 않는다는 의미죠. 지식인층이 많고 어느 정도 화술이 있는 신자가 많기 때문에 요새 신부가 사제 생활에 힘든 점을 토로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들이 어떤 점에선 교회를 쇄신하는데 의미를 줄 수 있어요. 반대로 부정적인 측면은 이 사람들이 지금까지 자신의 현실적인 관심에만 몰두해왔기 때문에 지금의 자리에 왔다고 본다면, 그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관심이 교회에 그대로 먹혀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세속주의화 되거나 현실적인 맥락에서 움직이는 데에 돈 있는 평신도들이 은연중으로 그런 역할을 하지 않을까 여겨집니다.
아침이슬 : 사제들도 인간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문제일 것입니다. 제가 만났던 어떤 사제는 복음적 확신이나 의식 수준이 좀 떨어지는 사람으로 여겨지긴 했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해외 교포사목을 나가면 통상 몇 억을 모아오는 것이 보편적인데, 자신은 돈이 없는 지역이어서 거의 모으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하는데 사목하는 현장을 살펴보면 실제로는 그 지역에서 가장 돈 많은 사람들과 주로 어울립니다. 그러다보면 본당 공동체의 초석을 다졌던 가난한 사람들은 상대적인 박탈감 때문에 성당에 나오지 않게 됩니다. 결국 선택은 사제의 몫인데, 자연스럽게 돈 많은 기득권층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한국 교회의 모습이 세상과 별 차이 없다는 말이 됩니다.
정중규 : 교회가 지닌 이런 그릇된 현상은 그것이 교회공동체 전체의 구원 차원에까지 닿는 보다 근본적인 문제, 곧 교회 자신의 신원과 정체성에 바로 직결되기 때문에 더욱 심각하다고 봅니다. "백성 중 길 잃은 양들을 찾아가라"는 제자파견사에서 보듯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선교는 소외된 이들을 껴안는 작업이었기에 ‘공동체성(共同體性)’이야말로 교회의 존재 이유로서, 교회 내에서조차 소외된 이들이 생겨나 그 공동체성을 잃어버린다면 교회는 이 세상을 향해 죄악을 저지르는 꼴이 된다고 봅니다. 진정 아흔 아홉 마리의 양들을 들판에 그대로 두기까지 하면서 한 마리의 길 잃은 양을 찾아 온 들판을 헤매는, 그리하여 그 양을 되찾고 품에 안고 돌아와 기뻐하는 목자의 마음이야말로 그 공동체성을 온전케 지켜내려는 교회다운 마음씀이 아닐까 여겨집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선교’(Missio Dei)가 무엇보다 길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찾는 데 우선되는 것도 소외된 자에 대한 관심과 동참이 그러한 교회존립의 필요충분조건이 되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왜 신자들은 교회를 떠나는가
사회자 : 요새 쟁점이 되는 것이 냉담자 문제인데 그것과 어떤 연관이 있을까요?
아침이슬 : 교회공동체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도 물어보면 천주교 신자라고 대답하기 때문에 인구센서스에서는 신자비율이 엄청나게 높게 나옵니다.
사회자 : 성당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가난하기 때문에 못 나오는 것도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
아침이슬 : 그렇지요. 아무리 일이 많아도 자신에게 기쁨이 되면 짬을 낼 수 있죠. 하지만 갈수록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성당에서 기쁨을 누리기가 어렵게 되었다고 볼 수 있지요.
김정대 : 우리 본당이 일종의 사회적 교제 장소로 변질되고 있다고 봅니다.
정중규 : 그렇습니다. 이미 그리스도교, 그 중에서 특히 가톨릭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종교로 공공연히 인정받고 있는 현실에서 입교자들 가운데엔 교회를 참된 구원의 문으로 여겨서라기보다는 소속감과 신분상승의 사교적 욕구 해소를 위해서 찾아오는 경우도 많다고 봅니다. 그렇게 볼 때 교회의 물리적 성장을 마냥 좋아라 할 현상만은 못 되는 것이라고 봐야하지요. 오히려 우리 사회가 지닌 이 '흰개미탑 현상'이 뜻하는 바를 직시해 그것을 바로잡고 신자들의 영적 성숙을 도모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사회자 : 성당에 가도 항상 모이는 그룹이 있지요. 겨우 짬을 내야 나올 수 있는 사람들은 그 그룹에 끼지 못하니까 좀 외롭죠. 레지오 마리에도 계모임처럼 되었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려옵니다.
김정대: 그건 사람들마다 성격이 달라서 그럴 수도 있어요. 어떤 면에서는 지식인들이 많이 냉담할 것 같아요. 예전에는 사제의 교육수준이 높았지만 지금은 전문직을 가진 일반인이 많잖아요. 상대적으로 교육수준이 높은 평신도가 많이 생겼고, 그런 상태에서 권위적인 교회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본당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저녁미사에 나옵니다. 청년미사이기 때문에 분위기도 다르고, 미사 끝나면 모두 집으로 가는 분위기이기 때문에, 여기 와서 이것 해라 하는 소리를 들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저녁미사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환대를 해주면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경동현 : 활동에 의해서 양극화가 굉장히 심해지고 있기도 합니다. 실제로 단체장들을 교육할 때 가보면 본당 활동을 굉장히 부담스러워 합니다. 본당 신부님이 바뀌면 그 참에 활동을 그만두고 쉬려는 분들이 많습니다. 본당 활동을 열심히 하시는 분은 안 하는 사람 때문에 일이 집중되어 부담이 커지고, 나머지 사람들은 활동을 아예 안합니다.
김정대: 도시가 좀 그런 경향이 더 많겠지요. 시골 같으면 소탈하게 어울리는 분위기라서 조금씩 일을 거드는데, 도시는 나 같아도 옆에 누가 사는지 모르고 이제는 이웃을 만나도 쑥스럽더군요. 아파트 같은 경우에 더 그럴 것 같습니다. 관계의 깊이가 시골과는 다를 것 같아요.
정중규 : 공감하는 부분입니다. 평소에 그리스도교의 실천적 수행 부분에서의 미흡함을 느끼고 있기에 늘 참된 종교인이 되려면 불교의 수행 부분과 그리스도교의 신앙적 열정을 모두 지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만이 성숙된 신앙인으로 거듭 날 수 있는 길이라고 여기고 있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너무 들떠있다고 보기에 삶을 정돈시키고 마음을 다스리기 위하여 수행정진하며 살아가는 삶의 자세도 필요하다는 바램도 지녀봅니다.
아침이슬 : 전직 목사이며 신학자인 유상태라는 분이 <한국교회는 예수를 배반했다>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한국 같은 사회상황 속에서는 개신교와 가톨릭 공동체는 계모임이나 사교모임으로 발전시키고 종교적인 것이나 영성적인 것은 불교 쪽에서 취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합니다. 차라리 안 되는 것을 너무 비관적으로 보지만 말고 체질에 맞게 발전 시켜가는 것이 좋겠다고 합니다. 교회나 성당에 큰 기대를 하지 말고 종교나 영성적인 것을 불교에서 취하자는 것인데 그런 말을 들을 만도 합니다. 교회에 사실 종교적인 요소가 거의 없어지고 있으니까요.
 
 
평소에 그리스도교의 실천적 수행 부분에서의 미흡함을 느끼고 있기에
늘 참된 종교인이 되려면 불교의 수행 부분과
그리스도교의 신앙적 열정을 모두 지녀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만이 성숙된 신앙인으로 거듭 날 수 있는 길이라고 여기고 있지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너무 들떠있다고 보기에
삶을 정돈시키고 마음을 다스리기 위하여
수행정진하며 살아가는 삶의 자세도 필요하다는 바램도 지녀봅니다.
 
사회자 : 미사 예식과 사제의 복장, 수녀님의 수도복, 우리 교회는 보여지는 것을 무척 좋아합니다. 본당에선 수많은 행사를 진행하는데, 질적인 것이 없으니까 보여주는 것을 좋아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미사 시간에 영화도 보여주면서 하는, 이벤트나 행사를 자꾸 하는 것은 영적으로 고갈이 되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아침이슬 : 교회의 지도자들이 공동체에 나오는 신자들을 반가워하고 기쁘게 맞이하는 것, 거기에 머물러야 하는데 요즘에 잘 나가는 교회에서는 고객 감동의 시대에 찾아오는 신자를 감동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사이 잘 되는 교회의 캣치프레이드는 대부분 고객감동입니다. 이것은 아닌 것 같아요. 서비스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이 좋아서 교회를 찾아야 하는데 그런 것이 안 되고 있는 것입니다. 광고와 홍보의 홍수를 통한 인기몰이로 한탕 해내는 방법을 세상에서 배우자는 식입니다. 기업들도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려고 애쓰는데, 교회도 그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
김정대: 감동을 주는 것은 그리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 방법이 문제입니다. 차를 마시면서 이야기를 한다든가 하는 사귐과 나눔을 통해서 해야 합니다.
아침이슬 : 예전엔 교회 공동체에서 쉬고 있는 신자들을 많이 구박했는데, 지금과 같은 현실에서는 주일에 하느님을 찾겠다고 오는 신자들이 얼마나 감사한지 깨달아야 합니다. 고마워서 우리 사제들도 봉사하는 자로서 신자들에게 화답하는 마음으로 최대한 정성과 봉사로 감동을 줘야 한다는 마음이 우러나와야 합니다. 그게 아니라 사목을 그저 ‘서비스’라는 차원에서만 고려해선 안 되죠. 어떤 이들은 이걸 보고 교회가 새로워 보인다고, 은총이라고 느끼기도 합니다.
사회자 : 적절한 말을 찾는다면, 신자들에게 감동보다는 감명을 줘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마음에 차오르는 무엇인가를 줘야 합니다.
아침이슬 : 잘 되고 있다는 개신교회를 가 본 적이 있었습니다. 가톨릭에는 아직 그런 교회가 없지만, 개신교는 세속주의 정도가 정말 심한 경우가 많아요. ‘바깥에서도 고객에게 저렇게 감동을 주는데 왜 우리는 그렇게 못할까?’라고 하면서 기업이나 세속의 방식을 교회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지요. 이제는 찾아오는 신자들을 고객으로 봐야한다는 겁니다. 이전에는 교회에서 신자들에게 100원을 거둬서 10원을 썼다면, 50원을 썼더니 1,000원이 다시 들어오더라는 것을 알아채 버린 것입니다. 즉 교회가 신자들에게 착각을 일으키게 만들어 갑니다. 고객감동의 차원에서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거듭난다고 합니다. 이를테면 교회에서 점심을 제공한다든가 교회 안에 카페를 만들고 여러 가지 생활문화를 누리게 함으로써 주일 하루는 교회에서 종일 즐기게 하는 방식입니다. 그런 걸 보고 유상태 씨는 교회에서 종교적이고 영성적인 것을 기대하기 힘들다고 판단한 것이고, 차동엽 신부 같은 이들은 이제 사람들에게 영적이고 종교적인 것을 말하기 보다는 상업적이고 세속주의 적인 것, 이를테면 건강이나 돈을 통한 성공신화를 부추기면 사람들에게 감동 메시지를 줄 수 있다는 코드를 꿰뚫어 보게 되는 것입니다.
 
성공론은 상업주의와 세속주의 코드에 맞닿아 있다
정중규 : 인간은 물질적 존재인 동시에 정신적 존재입니다. 교회가 우리 사회의 인간화와 복음화를 위해 다가갈 때 무엇보다 전제되어져야 할 것은 그들에 대한 인간 존엄성 차원에서의 깊은 이해라고 봅니다. 그런 관점에서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가지고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는 주님의 '열 두 제자파견사'는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교회 사업이 지향해야 할 모습을 드러내 주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는 때로 아무 것도 받은 것 없는 데도 왠지 감사하고픈 마음이 솟구치고 마냥 좋아지는 그런 사람을 만나는데, 교회가 그러해야 한다고 봅니다. 물론 물질적인 도움도 필요하지만 그것이 선교정복시대의 선교사들이 위문품 던져주듯 한다면 그야말로 신앙적 관점에선 헛된 짓일 따름이라고 여겨집니다. 우리 교회가 세상에다 안겨다 줄 '금이나 은' 같은 것을 굳이 지니고 있지 않아도 되는 이유는 그런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더 좋은 것'을 줄 수 있기 때문이고 또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현대인들은 교회에 대해 세속적 물질 이상의 그 무엇을 바라고 있는데, 바로 그것을 채워 주어야 합니다. 고객감동식의 물량주의적 선교전략 하에 물질적인 무언가를 안겨다 주려고 안달하기 보단 그들과 인간다운 삶을 나누고 인격적으로 깊이 결합되어 그 어떤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줄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교회사업의 근본성격도 바로 거기에 비롯됩니다. 온갖 좋은 것을 "거저 주시는" 하느님께 원천을 두는 까닭에 우리도 "거저 줄 수 있는" 아가페적 차원에로 나아갈 수 있는 겁니다. 교회 사업이 그처럼 영성화 되지 못한다면 그 결실 역시도 땅의 것일 따름이며 이 역시 교회의 신원과 정체성에 맞닿고 있는 문제라고 봅니다.
 
개신교는 세속주의 정도가 정말 심한 경우가 많아요.
‘바깥에서도 고객에게 저렇게 감동을 주는데 왜 우리는 그렇게 못할까?’라고 하면서
기업이나 세속의 방식을 교회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지요.
이제는 찾아오는 신자들을 고객으로 봐야한다는 겁니다.
이전에는 교회에서 신자들에게 100원을 거둬서 10원을 썼다면,
50원을 썼더니 1,000원이 다시 들어오더라는 것을 알아채 버린 것입니다.
 
김정대 : 기본적으로 사제는 신자들이 자신의 답답한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합니다. 미사 시작 20분전에는 고해성사실에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답답한 이야기, 황당한 이야기를 들어줘야 합니다. 미사 전에 못 오는 사람을 위해서는 언제든지 고해 성사를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합니다. 미사 끝나면 강론도 가능하면 빨리 끝내야 합니다. 신자들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하면 강론이 길어져요. 저는 미사 끝나고 신자들과 잠깐이라도 이야기를 나누며 인사를 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제가 본당 공동체에서 리더 역할을 하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권위적이지 않고 나누는 모습이 더 필요합니다. 할머님 할아버님에게 인사를 드리고 모든 신자에게 인사를 하는 것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제가 본당에 있을 때, 꼭 하나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는데, 일주일에 한 번 구역별로 사람들을 초대하여 사제관에서 잔치를 하고 싶었습니다. 사제관에 술 좀 사놓고, 음식은 각자 한 접시씩 가져오고. 그런 것을 하고 싶었지만 당시엔 보좌신부라서 맘대로 할 수 없었죠. 어떤 사람들은 본당 사제와 술 먹으며 식사하는 것을 굉장히 원합니다. 그런데 잔치를 하면 그런 사람들조차도 한꺼번에 끌어들이는 것이죠. 같이 마시면서 이야기하다보면 굉장히 관계가 깊어집니다. 신자들은 사제와 이야기 하는 것을 굉장히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하면 가난한 사람들도 좋은 생각을 갖고 많이 참여하지 않을까 합니다.
 
고객감동식의 물량주의적 선교전략 하에
물질적인 무언가를 안겨다 주려고 안달하기 보단
그들과 인간다운 삶을 나누고 인격적으로 깊이 결합되어
그 어떤 것보다 '더 좋은 것'을 줄 수 있는 그런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는 교회사업의 근본성격도 바로 거기에 비롯됩니다.
 
정중규 : 이런 저런 현실을 보면서 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이른바 교회적인 성장은 사회적인 성숙으로 연결되지 못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자신도 의식치 못하는 이중적 삶의 태도, "믿음이 자랐다", "구원에 확신이 섰다"하지만 언제나 그것은 현실에 오면 뜬구름 잡기, 떼로 몰려 있는 것은 좋아하나 빈약한 공동체의식, 다른 이웃에 대한 이해와 관용이 결핍된 폐쇄성과 독선 등등. 그것은 무엇보다 교회에 잘못이 있다고 봅니다. 교회는 신자들을 교회공동체의 품 안에 안주토록 하며, 폐쇄적인 집단 속에 안식시켜 놓고서 만 년(萬年) 미성숙자로 만들어 갑니다. "올바른 삶의 태도를 깨달아 지녀 용감히 사회현실 속으로 뛰어 나가라"고 하진 않고, 사탕을 주고 젖을 주며 사랑스럽고도 충성스런 교회의 자녀로 언제까지나 남도록 이끕니다. 여기에서 ‘하루 성인(聖人) 엿새 범인(凡人)’인 일요신자(日曜信者), 곧 교회건물 안에서만 성인이지 사회나 심지어는 가정 속에서조차 비신자보다 더 못한 행실을 떳떳이 하게 만듭니다. 우리 장애인복지에 사회와 가정과 사회를 이어주는 ‘중간쉼터’라는 것이 있는데 교회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스도인은 거기에서 출발해 사회라는 광야를 향해 하느님의 뜻을 펼치며 용감히 건너야 합니다. 교회는 종착점도 안식처도 아니며, 폐쇄적인 게토나 소도(蘇塗)는 더더욱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는 착한 사마리아인이어야 하고 강도 만난 나그네가 머물고 갈 여인숙입니다. 여인숙은 고침을 받고 잠시 휴식한 뒤 갈 길을 떠나는 곳입니다. 그렇게 교회는 신자들을 향해 "내가 너와 함께 하리니, 용감히 나아가라!"고 쉼 없이 외쳐야 할 것입니다.
사회자 : 이쯤에서 세속주의와 성공주의에 대해서 좀 더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요즘 차동엽 신부님의 <무지개 원리>라는 책이 인기라던데.
김정대 : 아까 아침이슬 선생님이 세상이 원하는 코드를 간파했다고 이야기했는데 맞는 것 같습니다. 차동엽 신부님 책을 봤는데 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더군요. 다 맞는 이야기이지만 이 이야기를 굳이 사제가 해야 하는가 싶습니다. 사실 우리사회가 무거운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인지 이 <무지개원리>라는 책에선 사회정의 문제를 회피하고, 아예 그런 문제에 대한 언급조차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뒷전이지요.
아침이슬 : 가난한 사람들과 실패를 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일체 말하지 않습니다. 성공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실패했을 경우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려주지 않습니다. 동네 미용실에 앉아서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의 얘기를 들었는데, 가톨릭신자인 듯한 분이 책 이야기를 합니다. 12,000원이나 되는 <무지개 원리> 책을 샀는데 너무 좋았으며, 차동엽 신부가 얼마나 강의를 잘 했으면 방송을 한 달이나 했겠느냐며 너무 자랑스러워합니다. 12,000원 주고 산 것과 강의를 잘 한다는 것 그뿐입니다. 책과 강의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물었을 때 잘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단지 책이 좀 비쌌지만 너무 좋기에 기꺼이 샀다는 것과 너무나 잘 하기에 공중파 방송에서 강의했다는 것, 바꾸어 말하면 상업주의와 스타(우상)주의에 기댄 세속주의 코드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좀 야비해서인지 모르겠지만, 차동엽 신부가 그 코드를 간파해 내고 의도적으로 그렇게 했다고 여겨집니다. 비신자는 물론이고 신자들조차 영성과 진리 그런 것은 따분해하는 요즘, 차신부처럼 그렇게 말씀을 잘 하시는 능력 있는 분이 종교적인 언어를 차용하지 않은 채 세속 사람들에게 영적인 진리를 전해줄 수 있고, 세속적인 성공을 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이 책은 오히려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을 가르칩니다. 지구촌에서 가장 많이 성공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탈무드를 읽었는데, 이것이 바로 한국판 탈무드라고 한다든가 하는 것이 그런 코드인 것입니다. 오히려 사람들에게 가난한 채로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에 대한 자긍심을 나누어주고, 그분과 함께 한다면 실패해도 기쁨을 잃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것을 나누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차신부처럼 그렇게 말씀을 잘 하시는 능력 있는 분이
종교적인 언어를 차용하지 않은 채
세속 사람들에게 영적인 진리를 전해줄 수 있고,
세속적인 성공을 하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김정대 : 티브이에서 하는 강의를 들어봤는데, 정말 차동엽 신부가 말씀을 잘 한다는 느낌이 들더군요. 저는 대중강연을 해본 경험이 별로 없습니다. 사실 저한테는 그런 것이 중요하지도 않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계속 이야기 하는 것을 들어보면서 약간 짜증이 났습니다. 저래서 맘대로 되지 않을 인간 조건들을 어떻게 끌어안고 살 수 있을까, 끌어안지 못해서 힘든 것인데, 하는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우리에게 물질적인 욕구를 어떻게 충족해야 하는지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부족한 인간들이 어떻게 어울려 살아야 하는지 이야기하셨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고통을 겪는데 그것을 어떻게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지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이런 측면에서 이것은 신앙서적이 아니지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사제가 말하는 것을 보고 신앙서적으로 착각합니다. 성공론을 하느님 말씀처럼 듣는다는 것입니다.
아침이슬 : 저는 제 자신이 희귀난치병 환자라는 것을 모른 채 40년 동안 고생을 해 오다가 지난달에야 진단을 받고 알게 되었습니다. 무슨 병인지 몰랐기에 다른 대안도 없었지만, 오랜 동안 고통을 단지 참아내는 것만으로 내성이 키워져서 제 경우 왠만한 고통은 끌어안은 채 활동이 가능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이 난치병 환자들은 삶의 질이 굉장히 비참합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은 어떻게 성공을 해야 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원인이 없지 않겠지만 어쩔 수 없는 고통을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사람이 어떻게 성공을 해야 하는지 그런 것은 그 책에 나와 있지 않아요. 그러나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는 세상에서 말하는 성공을 하지 않았어도 기쁨을 잃지 않은 채 잘 살고 있습니다. 예수가 나와 같은 사람을 위해서 왔다는 것을 생각할 때, 내가 이 고통을 겪으면서 임마누엘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분께 의지하고 살 수 있음을 생각할 때 저는 감사합니다. 누구나 때때로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할 수 있읍니다. 우리는 성공했거나 실패했거나 어떤 경우에도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기쁜 이야기를 나누고 전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고 강의를 듣다보면 우리 자신이 천주교 신자가 된 것만으로도 이미 이 세상에서 성공을 이룬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특별한 의식이 없는 신자대중의 경우 이런 성공이라는 현실적인 자긍심을 선물해준 강사가 사제라는 사실은 폭발적인 시너지 효과를 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우리에게
물질적인 욕구를 어떻게 충족해야 하는지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분은 부족한 인간들이 어떻게 어울려 살아야 하는지 이야기하셨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고통을 겪는데
그것을 어떻게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지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이런 측면에서 이것은 신앙서적이 아니지요.
 
김정대 : 그래서 깨달은 것은 ‘사제’라는 신분이 일반 세상에서는 상품성이 있구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딱 맞아 떨어진 것이지요. 방송에서 강의 잘 하겠다, 청중을 휘어잡는 힘이 있기 때문에 세상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정말 딱이겠지요.
아침이슬 : 처음에는 차신부도 대중이 좋아하는 코드를 잘 몰랐을 수 있겠죠. 그저 신자들이 의기소침해 있고, 가톨릭을 부흥시켜야겠다는 마음 때문에 그리 해봤겠지만, 해보다가 코드를 알고 계속 활용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미필적 고의가 아니라 고의라는 생각이 듭니다.
정중규 : 작금의 이른바 '차붐' 현상을 염려스런 눈길로 보는 까닭은 그것이 한국 가톨릭교회의 보수화 및 세속주의 현상과 밀접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차동엽이라는 아이콘이 가톨릭 안에서 이렇게 떠오르는 이유는 바로 한국 가톨릭교회가 양적으로 급속 성장을 거듭하며 이뤄져 왔던 가톨릭의 개신교(근본주의)화, 가톨릭의 구약으로의 회귀와 그 어떤 관련성이 있다고 봅니다. 세속적 성공과 행복을 노래하는 것, 그것 자체를 나쁘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또 그것이 안병욱 교수의 <행복론> 같은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리 문제될 것도 없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의 이름으로, 복음의 이름으로,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것도 사제가 나서서 세속적 성공과 행복의 찬가를 부른다는 것은 분명 무언가 어색하고 보기도 좋지 않지만 무엇보다 자칫 반복음적이고 비복음적으로 신자들과 우리 사회를 이끌 위험성이 높기에 염려하는 겁니다. 차동엽 신부는 "가톨릭이 70~80년대에는 정의 구현으로 대중의 신뢰를 얻었지만 이제는 사회 전면에서 대중의 삶을 함께 살고 도와주는데 더욱 투신해야한다."고 지적하지만, 우리 사회의 현실은 아직 그리 만만치가 않고 갈 길은 멀기만 합니다. 오히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쓰나미 속에 갈수록 심화되어 가는 빈부격차와 사회양극화 문제, 비정규직 문제에서 나타나듯 더욱 더 교묘해지고 정교해져 나눔을 가로막으면서 서민들의 삶을 옥죄는 비인간적이고 반공동체적인 장치들이 산재하는 이런 반복음적이고 비복음적인 사회현실을 눈앞에 두고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서의 교회의 역할은 과연 끝났다고 할 수 있을지. 오히려 보다 나은 사회를 낳기 위하여 한 알의 밀알이 되어야 하는 교회의 역할은 더욱 더 필요하고 그 책임 역시 갈수록 커져만 가고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차동엽이라는 아이콘이
가톨릭 안에서 이렇게 떠오르는 이유는
바로 한국 가톨릭교회가 양적으로 급속 성장을 거듭하며
이뤄져 왔던 가톨릭의 개신교(근본주의)화,
가톨릭의 구약으로의 회귀와 그 어떤 관련성이 있다고 봅니다.
 
왜 사람들은 무지개 같은 원리 성공원리에 열광하는가
사회자 : 비신자인 일반인은 그렇다 치더라도 신자들이 <무지개원리>를 읽는다면 어떤 영향을 받게 될까요? 또 그들이 왜 그렇게 우상처럼 그 신부님의 마니아가 되고 있을까요?
아침이슬 : 장경동 목사가 공중파에 나와서 떴잖습니까? 가톨릭 신자 입장에서 그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우리 가톨릭에도 저런 사람이 있었으면’하는 기대를 가졌을 수 있지요. 스타지상주의와 맞물려서 ‘우리도 한 사람 쯤’하는 생각을 하는 딱 그런 시기에 차동엽 신부가 나온 거죠. 장경동 목사는 굉장히 수더분한 편이지만, 차신부는 멀리서 보면(가까이서 보면 그것도 아니지만) 지적이고 귀티나면서 천박하지 않은 이미지를 줍니다. 장경동 목사에게 투사되는 이미지를 업그레이드 시켜서 로만칼라를 하고 신자들의 현실적인 욕구를 부추겨 준다는 것은 참으로 신나는 일이지요. 아마 이미지에 현혹이 되어서 내용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을지도 모르죠.
사회자 : 알다시피 무지개 원리 강의는 신앙 강좌가 아닙니다. 성공을 위한 비결을 알려주는 길잡이라고 해야 하겠지요. 그러니 당연히 종교적인 교의와 상관없는 것인데도, 신자들은 그분이 사제이고 로만칼라를 차고 나와서 이야기하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게 무심코 교리적으로 듣게 됩니다. 무엇을 말하든지 말하는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하느님 말씀으로 듣기도 하는 까닭이지요. 사제란 모름지기 하느님의 나팔수가 되어야 하잖아요. 다른 곡조를 부른다면 할 수 없는 노릇이지만. 만약 그 강의를 일반인이 한다면 그저 재밌게 들을 수 있는데, 오해하지 않고. 어차피 참고서 중 하나일 테니까요. 사제는 공인이라서 좀 가려서 일을 할 필요는 있는 거겠죠.
김정대 : 그 강의랑 책은 기업인들에게는 어울리는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조직을 효율적으로 하려면 이런저런 식으로 해야 한다는. 하지만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니죠. 말 자체는 영 틀린 이야기가 아닌데 듣는 대상의 처지에 따라 문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 시각에서는 역겹게 들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경영이나 그런데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귀에 들어오겠죠.
아침이슬 : 그것은 인정하는데요, 만약 차신부 아닌 다른 사람이 강연을 해서 저 정도의 인기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 말들이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진짜 희망을 줄 수 있고 가치로 남아 있을까? 도 생각해 보는데 그렇지 않을 거라고 여겨지니까 더 답답해지네요.
김정대 : 저도 그분의 말씀이 모든 사람들에게 성공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기본적으로 기업인도 아니고 성공에 대한 갈망도 없어요. 문제가 되는 것은 사제가 신앙적인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에게 신앙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는 거죠.
아침이슬 : 저는 그런 말을 한 사람이 사제가 아니라 해도 내용 자체만으로 문제 삼았을 것 같아요. 어쩔 수 없이 우리 사회의 문화와 가치를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한데, 전 그게 잘 안돼요. 그래서 자꾸 쓸데없이 미워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내가 개인적으로 아무런 감정도 없고 관계도 없는 사람을 두고 왜 이러는지, 모종(?)의 질투를 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조차 듭니다. 그분이 사제복을 입고 거기 서있으니 우리와 무관하다고 할 수 없다는, 그 상황이 얄밉게 느껴지나 봅니다.
김정대 : 얼마 전에 어떤 사람이 그 책을 들고 왔더라구요. 기업을 운영하는 사람이었는데, 어느 신부님이 사주셨다고 하더군요. 나중에 읽어보니 기업하는 사람들이 읽어보고 싶어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도 마음 한편은 여전히 개운하지 않았어요. 그 책에선 3만 불 시대 이야기 하는데, 중요한 것은 우리가 3만 불이 없어서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죠. 우리가 2만 불 시대 살면서 이런 이야기 하고 있지만, 3만 불이든 4만 불이 되든 우리 상황은, 가난한 이들의 상황은 별로 달라질 것이 없을 것이라고 봅니다.
아침이슬 : 그렇죠. 그렇다면 능력 있는 차 신부님 같은 분이 세상 사람들에게 진정한 성공에 대하여, 3만 불에 진입하지 않더라도 어떻게 기쁘고 행복하게 만족하면서 살 수 있을까 하는 것을 말해줘야 합니다. 버지니아 텍에서 일어난 조승희 군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는 아직까지 조사 중인데,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지만 그가 했던 경고 중에 이런 것이 있어요. “너희는 벤츠를 타고서도 만족할 줄 몰랐다.” 이 친구가 표현을 좀 거칠게 했지만 옳은 메시지라면 받아들여야지요. 아무리 작고 가난한 것이라 할지라도 나에게 주어진 것을 감사할 줄 아는 것이 성공이라고 여겨야 하는데,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를 넘어서 상업주의와 세속주의에 물들어가는 절대다수의 이웃들을 질타한 것이지요. 존재 자체를 감사해 하면서 참다운 의미의 성공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다고 기대되는 차신부가 그렇게 하지 않아서 아쉬운 것이지요. 스스로의 성공을 위해 오히려 상업주의와 세속주의를 고의적으로 차용했다는 것은 참으로 받아들이기 힘들고요.
 
그분의 말씀이 모든 사람들에게
성공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저는 기본적으로 기업인도 아니고 성공에 대한 갈망도 없어요.
문제가 되는 것은 사제가 신앙적인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는데도,
사람들에게 신앙적인 이야기로 들릴 수 있다는 거죠.
 
김정대 : 박사란 학위는 사회에 대해서 무언가 말을 해도 된다는 권위를 받은 것인데 사회에 대해서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것은 그 권위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 아닌가요?
아침이슬 : 사실 알 수 없는 일이죠. 기도를 해서 효력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해 보지 못했지만 차동엽 신부가 앞으로 그렇게 되지 말라는 법도 없습니다. 우리가 함께 기도한다면 그분이 나중에라도 예수처럼 살지 말라는 법이 없죠. 그런 능력으로 그렇게 하기를 바랄 뿐입니다.
김정대 : 성공하지 못한 사람을 위해서 이야기를 해주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러면 사회비판적인 이야기도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책에선 그런 주제는 피해가고 있습니다.
아침이슬 : 적어도 이런 점은 확인된 것 같아요. 차동엽 신부님이 세상 사람들은 물론이고 중산층 신자들이 사회문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불편해 한다는 것을 꿰뚫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강의에서도 사회적인 내용은 일체 하지 않습니다.
김정대 : 사제가 가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직무유기입니다. 그것은 복음의 근본적인 요청이니까요.
정중규 : 맞습니다. 우리 시대 교회가 세상을 향해 외쳐야 할 것은 성공예찬이 아니라 오히려 나눔 실천을 위한 공동체 정신이요, 양심회복을 위한 윤리적 각성이요, 현실안주나 만사형통이 아닌 참된 부활을 향한 파스카의 신비 그 체현이어야 한다고 봅니다. 대중적 인기에 영합하거나 박수소리에 들떠 우리가 참으로 지켜야 할 소중한 것을 결코 잃어버려선 안 된다고 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창하신 ‘진복팔단’은 교회와 복음의 반사회성을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분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몸소 증거하신 십자가는 교회건물의 첨탑이나 제대 뒤의 장식품이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 현실 속에 제시된 실천적 구원의 길이라고 봅니다. 거기에 어쭙잖은 성공 논리가 자리 잡을 틈새는 전혀 없다고 봅니다. ‘시대의 징표’에 예민한 감성을 교회는 지녀야 합니다. 교회는 속아서도 안 되지만 속여서도 안 된다고 봅니다. "내가 전하는 말에 한 점도 빼거나 보태지 말라"는 주님의 서릿발 같은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가난의 복음에 대한 주님의 말씀은 엄정하기만 합니다.
사회자 :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는 성경의 핵심을 놓치면서, 이런 식으로 말리는 것 같습니다. 인간이 갖고 있는 탐욕과 탐심에 주목하는 것 같아요.
아침이슬 : 전에 개신교 목사님들이 70~80년대 부흥회 때 쓰던 방식 이른바 ‘해결사 신앙’을 재탕하는 것이지요. 기억나십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십시오. 해~결 받습니다!!’ 그 당시는 신자 대중의 주류가 ‘가난한 사람들’이었고, 그걸 알아차린 목사님들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을 말하고 성경을 던져줌으로써 희망을 줄 수 있었지요. 그 대가로 헌금을 통한 교회부흥과 목사 자신의 인기를 통한 명예욕구 충족을 담보할 수 있었고요. 이제 시대가 바뀌어 이미 천주교가 중산층화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교회가 그 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의도적으로 가난하고 뒤처진 사람들에게는 눈길조차 주지 않는 것 같습니다.
김정대 : 중산층에는 이기적인 중산층 밖에 없나요? 건강한 중산층은 없나요?
아침이슬 : 건강한 중산층은 이런 무지개 원리와 같은 종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겠지요. 건강한 중산층은 탈무드 정도에 눈길을 주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벌써 교회 공동체를 떠난 지 오래일 수도 있고요.
김정대 : 그럼 우리 교회도 건강하지 않겠네요.
아침이슬 : 천박한 사람들이 자신의 이미지 메이킹을 통해, 천박한 내용과 행동을 고상하고 귀티 나게 포장하는 것을 볼 때 더 화가 나는 것 같습니다.
사회자 : 마음이 정말 답답해집니다. 앞으로 현실을 살아가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안에서 복음을 살려내는 역할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마무리 발언 한 두 마디 부탁합니다. 오늘은 문제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눈 것 같은데 다음번에는 해답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평화를 주러 온 줄 알지만 칼을 주러왔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우리 교회 안에서 분열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생각을 공개적으로 분명히 말할 수 있을 때
복음을 찾아가는 우리 교회의 능력도 분명히 생길 것입니다.
 
김정대 : 마지막 질문인 것 같네요. 교회와 세상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그 경계가 좀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교회는 세상 안에 더 깊이 들어가야 합니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하듯이. 좀 더 무거운 현실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사회의 양극화 문제가 얼마나 심각합니까? 많은 신자들이 이 문제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어떤 배려를 해야 할지 고민을 더해야 합니다. 수도자들이나 성직자들이나 교회 일선에서 사도직에 투신하는 사람들이 중산층보다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더 많이 가고 그들의 경험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들의 고통에 연대해서 함께 어려움을 나누는 마음이 필요하고, 실천적으로도 매일 같이 그네들의 삶의 현장을 가지는 못하지만 시간을 정해놓고 잠시라도 현장에 가는 경험이 필요합니다.
아침이슬 : 저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 마음 안에는 본질적으로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여전히 간직되어 있다고 확신합니다. 우리가 희망하는 것, 진리로 접근하려는 마음, 우리 안에 있는 사랑, 그런 것 안에 하느님이 함께 하신다는 신뢰가 있다면 언젠가 진실이 드러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평화를 주러 온 줄 알지만 칼을 주러왔다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보면, 우리 교회 안에서 분열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생각을 공개적으로 분명히 말할 수 있을 때 복음을 찾아가는 우리 교회의 능력도 분명히 생길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정중규 : 거듭 말씀드리지만 교회의 신원 그 정체성 회복이야말로 이 시대, 특히 우리 한국 가톨릭교회에 있어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여겨집니다. 사실 우리 교회에서 빚어지는 세속주의적 병폐들은 다름 아닌 그 복음적 영성 곧 혼(魂)을 잃었기 때문에 파생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교회가 세속주의적 천박성에서 벗어나 복음적 영성의 깊음과 높음과 넓음 그 혼(魂)을 온전히 지닐 수 있게 된다면 그 어떤 상황이 닥칠지라도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세상구원을 위한 한 알의 밀알로 하느님만이 주실 수 있는 풍성한 은총의 열매들을 거듭 거듭 맺을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는 자에겐 그 모든 것도 곁들어 받게 될 것’이 분명한 까닭입니다. 그러기 위하여 무엇보다 필요한 것이 ‘가난의 복음’ 그 정신을 교회 안에 다시 회복하여 가장 낮은 데로 임하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대도시의 밤하늘을 어지럽게 밝히는 불야성(不夜城)같은 교회 첨탑들이 우리 모두에게 전해주고 있는 서글픈 메시지는 과연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환자가 지붕을 뚫고 내려올 만큼(마르 2,4) 낮고도 낮았습니다. 이 시대 교회가 자신의 천정을 찢으면서까지 사회의 모든 아픔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교회는 진정 우리 시대의 빛(Lumen gentium)이 될 것입니다.
사회자 : 이상으로 마치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Via Dolorosa - Sandi Patti
The Finest Moments (1990)
Sandi Patti
No.12 - Via Dolorosa
 
     
출처 : 어둠 속에 갇힌 불꽃
글쓴이 : 꼴통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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