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시즘의 입장에서 볼 때
평화는 정치의 방법, 힘과 이해관계의 균형으로만 이룩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마음, 사랑, 평화의 활동으로써 얻어집니다.
오늘날 인류는 이 위대한 건설을 위해 수고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역사 발전에 그렇게 많이 작용해온 이기적이고 호전적인 정신을 교정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선의의 사람들에게 하신 약속에 따르는 새로운 역사, 평화롭고 참으로 인간다운 역사를 향해서 우리는 단호히 전진해야 합니다.
평화는 전쟁 없는 상태만도 아니요, 적대 세력간의 균형 유지만도 아니며, 전제적 지배의 결과도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평화는 정의의 실현입니다.
인간사회의 창설자인 하느님이 인간사회에 부여하신 질서, 또 항상 보다 완전한 정의를 갈망하는 인간들이 실현해야 할 그 질서의 현실화가 바로 평화입니다.
현세의 평화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결과이며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그리스도의 평화의 모상이며 결실입니다.
강생(降生)한 그리스도는 평화의 임금으로서 당신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당신 육신 안에서 미움을 죽이고 부활로 현양(顯揚)되시어 사랑의 성령을 모든 사람들 마음 속에 부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왔고 평화를 남겨 주었으며, “나는 당신들에게 평화를 주고 갑니다. 내 평화를 당신들에게 줍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릅니다”(요한 14:27)고 말씀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와 인간 마음 속에는 선과 악의 신비로운 원인들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평화는 언제나 어려운 문제로 나타나고 비판적 해결책에 위협을 당하면서도 동시에 보다 행복스러운 해결책에 대한 위무와 희망을 느끼며 용기를 갖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라 부르며, 그것이 인류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구원의 역사 속에서는 인간의 온갖 상황들이 엄청나게도 신비로운 변천을 일으킵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라고 한 산상수훈(山上垂訓)의 일곱째 행복은 기억할 만합니다.
평화는 성령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며 축하이며, 성서적 축원(祝願)으로서 항상 우리 마음에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비롭고 마를 줄 모르는 평화의 샘을 우리 안에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평화인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습니다. (<<가톨릭대사전>> 한용희)
-실상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의로움과 평화와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입니다.(로마서 14:17)-
평화는 정치의 방법, 힘과 이해관계의 균형으로만 이룩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는 마음, 사랑, 평화의 활동으로써 얻어집니다.
오늘날 인류는 이 위대한 건설을 위해 수고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역사 발전에 그렇게 많이 작용해온 이기적이고 호전적인 정신을 교정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선의의 사람들에게 하신 약속에 따르는 새로운 역사, 평화롭고 참으로 인간다운 역사를 향해서 우리는 단호히 전진해야 합니다.
평화는 전쟁 없는 상태만도 아니요, 적대 세력간의 균형 유지만도 아니며, 전제적 지배의 결과도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해서 평화는 정의의 실현입니다.
인간사회의 창설자인 하느님이 인간사회에 부여하신 질서, 또 항상 보다 완전한 정의를 갈망하는 인간들이 실현해야 할 그 질서의 현실화가 바로 평화입니다.
현세의 평화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결과이며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오는 그리스도의 평화의 모상이며 결실입니다.
강생(降生)한 그리스도는 평화의 임금으로서 당신 십자가를 통하여 모든 사람을 하느님과 화해시키고 당신 육신 안에서 미움을 죽이고 부활로 현양(顯揚)되시어 사랑의 성령을 모든 사람들 마음 속에 부어 주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평화를 가져왔고 평화를 남겨 주었으며, “나는 당신들에게 평화를 주고 갑니다. 내 평화를 당신들에게 줍니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는 다릅니다”(요한 14:27)고 말씀하셨습니다.
인류 역사와 인간 마음 속에는 선과 악의 신비로운 원인들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평화는 언제나 어려운 문제로 나타나고 비판적 해결책에 위협을 당하면서도 동시에 보다 행복스러운 해결책에 대한 위무와 희망을 느끼며 용기를 갖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하느님의 섭리라 부르며, 그것이 인류의 운명을 좌우합니다.
구원의 역사 속에서는 인간의 온갖 상황들이 엄청나게도 신비로운 변천을 일으킵니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이 될 것입니다”라고 한 산상수훈(山上垂訓)의 일곱째 행복은 기억할 만합니다.
평화는 성령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며 축하이며, 성서적 축원(祝願)으로서 항상 우리 마음에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비롭고 마를 줄 모르는 평화의 샘을 우리 안에 가지고 있으며 우리의 평화인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습니다. (<<가톨릭대사전>> 한용희)
-실상 하느님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의로움과 평화와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입니다.(로마서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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