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성겸 순교자 묘소가10월1일 진례성당 인근에서 공식 확인되었다
이날 묘소 확인에는 순교자의 후손들과 이형수 몬시뇰(블라시오 .교구 총대리) 그리고 신은근 신부
(바오로 .호계본당 주임)가 함께 자리하였다 서성겸순교자는 당시 노루목공소의 중심 인물이었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 포졸들이 들이닥치자 서달서 서성달 노재익 박근기등과 함께
인근야산으로몸을 숨겼다가 사흘 뒤 집으로 돌아와 보니 여섯 자녀 중 세자녀가 포졸들에
의해 목숨을 잃었음을 알고 큰 충격을 받았다 한다
순교자와 부인은 관으로 찾아가 자수하였고
포졸들은 혹독한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하였으나
순교자부부는 끝까지 신앙을 지켰으며 결국 순교하였다
순교자의 직계 후손 중에는 우리교구 서원열 신부(라파엘 선종)와 서경윤 신부(알베르토 대구교구
신동본당주임)가 있다 이날 묘소를 찾은 서경윤 신부는 "순교하신 분들의 후손인 우리가
역사를 수집하고 정리하여순교자의 정신이 후대에 전달될수 있도록 힘쓰겠다" 라고 말하였다
기톨릭 마산 10월17일자에서
순교자와 부인은 관으로 찾아가 자수하였고
포졸들은 혹독한 고문으로 배교를 강요하였으나
순교자부부는 끝까지 신앙을 지켰으며 결국 순교하였다
이 대목에 이르러 목이 메여 눈물로 기도드립니다
서성겸 순교자 부부시여 저희 부부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너무나 믿음이 약한 저희부부를 위하여 빌어주소서
당신들의 크고 위대한 신앙을 저희들에게 보여주시니
주님께 감사드리오며
거룩하신 성령께서 함께 하여주시기를 청해봅니다
주님 저 순교자부부가 주님 대전에서 쉬게 하소서
주님 저들의 믿음이 하늘에서 빛나게 하시고
저희들이 그 믿음의 빛을 이어 받게 하소서
서성겸(徐聖兼) 요한은 경상도 김해 노루목
(現 경남 김해시 한림면 장방리)에서 신앙생활을 하던 분이었다.
어떤 경로로 그가 천주교에 입교했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그는 세례 받은 후 농사일을 하며 부인 윤씨와 여섯 자녀와 함께 열심히 살았다.
1868년 5월 부산에서는 이른바 박근기(朴根基) 사건이 발생했다.
서성겸은 이 사건에 연루되어 순교하였다.
당시 천주교인에 대한 정부의 감시가 삼엄해지자 진보 성향의 몇몇 교우들이
일본인 교우를 통해 서양인(西洋人)과의 접촉을 시도했다.
이들은 서양인을 만나 조선에도 종교의 자유가
실현될 수 있도록 조정에 힘을 써 달라는 편지를 전하려했다.
그러나 편지를 지니고 있던 박근기가 현장에서 붙잡힘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박근기는 심문을 받았고 동참했던 사람들에게는 체포령이 내려졌다.
서성겸은 그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거주지인 김해 노루목에 피신해 숨어있었다.
하지만 포졸들이 그곳까지 와서 서성겸 부부를 체포하려 했으나
찾지 못하자 어린 자녀 셋을 해치고 돌아갔다.
어린 자녀들의 죽음을 알게 된 서성겸과 부인 윤씨는 함께 김해 관아에 자수했다.
부부는 혹독한 문초와 심문을 받고 배교를 강요당했지만 끝까지 신앙을 지켰다.
이후 부부는 이미 잡혀와 있던 다른 교우들과 함께 관아에서 교살되어 순교하였다.
그들의 시신은 인근 야산에 아무렇게나 묻혔다.
2달 후 자녀와 친척들이 관의 허락아래 시신을 옮기기 위해
구덩이를 파니 시신이 상하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다.
이것을 보고 모두들 ‘정말 하느님께서 보살피셔서 기적이 일어났구나!’ 하며 감탄하였다.
가족들은 순교자의 시신을 선산에 모시려 했지만
친족들의 반대로 김해시 주촌면 내삼리 인근 야산에 임시 안장을 했다가
1909년 4월 순교자의 삼남 서석수 비오가 현 위치(김해시 진례면 시례리 산 106번지)에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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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성겸은 김해 노루목 본가에서 체포 소식을 듣고 급히 부인 윤 씨와 함께 피신했다.
장남 석원(베네딕토)에게는 동생들을 잘 보살피라고 일렀다.
부부는 마을 인근 공동묘지에 있는 낡은 움막에 숨었다.
장례 를 치룬 뒤에 버리는 것들을 모아두는 곳 이었다.
움막에서 3일을 버틴 뒤에 밤을 틈타서 나와 보니,
뜻밖에도 6자녀 중 3자녀가 포졸들에게 칼을 맞아 죽은 끔찍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큰아들 석원(20세)과 둘째 석형(16세)과 셋째 석수(13세)는
동생 을 돌보라는 부모의 부탁을 받았지만
포졸들이 갑자기 덮치자 당황하여 동생을 버려둔 채 도망갔던 것이다.
포졸들이 마을을 덮치며 서성겸의 집이 어디냐고 묻자, 동네 아이들이 곧 바로 가르쳐 주었다.
포졸들은 집안에 들어서면서 "너희 부모 어디 있냐?"며
아이들에게 무서운 얼굴로 다그쳐 물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모릅니다."라고만 대답했다.
이에 화가 난 포졸들이 아이들을 해친 것이다.
그때 죽은 자녀는 아들 2명과 딸 1명이었다.
부부는 충격을 받았다.
그들은 "우리 대신 어린것들이 죽고 말았으니 우리만 살아서 무엇하겠느냐?
차라리 자수하여 어린것들과 함께 순교하자."며 관가에 달려가 스스로 자수했다.
관헌들은 이미 잡혀온 신자들과 함께 이들을 심하게 심문했다.
그리고 쭈뼛쭈뼛한 쇠 송곳 여러 개를 불에 달구어 세워놓고는
"너희들이 앞으로도 교를 믿으려 한다면 이 송곳들을 밟고 지나가고,
안 믿겠다고 한다면 지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외쳤다.
그러자 순교자와 부인은 뜨거운 송곳들을 밟고 지나갔고 다른 많은 신자들도 지나갔다.
이후에도 포졸들은 이들에게 혹독한 형벌을 가하였다.
물론 그때마다 '믿지 않겠다.'고 말한 사람들은 풀어주었다.
이렇게 해서 끝까지 신앙을 고백한 서성겸 부부와 남은 교우들은 모두 순교하였다.
그들이 죽은 뒤 시신은 인근에 구덩이를 파고 함께 묻었다.
그러나 2달 후에 자녀와 친척들이 시신을 옮기기 위해 구덩이를 파니
신비롭게도 시신들이 상하지 않은 채 그대로 살아 있는 모습처럼 있었다.
이것을 보고 모두들 '정말 하느님께서 보살피셔서 기적이 일어났구나!'하며 감탄하였다.
시신을 찾은 뒤 매장을 위해 다시 염습을 하려하자 그제야 시신에서 피가 나왔다고 한다.
이렇듯 서성겸 부부와 다른 교우 들은 믿음을 증거하다 장하게 순교하였다.
그 후 서성겸의 남은 자녀인 석원, 석형, 석수, 삼 형제는 부모들과 같이 순교는 하지 않았지만
계속 노루목공소에 살면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후손들을 많이 낳았다.
그들의 후손 중에는 공소회장을 역임한 5대 종손 서성효(마태오)와 서정의 수사(베네딕도 수도회),
서경윤 신부(베네딕도 수도회), 서원열 신부(마산교구)가 있으며, 최재선 주교(부산교구)와 박도식 신부,
박문식 신부(대구대교구), 김재문 신부(안동교구)는 순교자의 외손이 된다.
(순교록 작성자 마백락, 증언자 서 안나, 서 에우랄리아, 서 크리소스토모 회장)
경상도 교회와 순교자들 737면~73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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