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과 서학 3> -실사구시(實事求是)와, 열매 맺는 회개(回心)-
다산 정약용은, ‘현실에서 올바름을 구한다’, ‘사실을 토대로 진리를 탐구한다’는 ‘실사구시(實事求是)’를 추구하여 대성한 실학자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젊은 시절에는 광암 이벽의 영향으로, 둘째 형 손암 정약전과 함께 서학에 심취했었다는 사실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정약전 역시 다산과 의견을 교환하면서 『자산어보(玆山漁譜)』를 쓴 실학자였습니다.)
그런데, 다산이 당시에 받아들였던 ‘실사구시’는, 실제 생활에서는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실사구시’와 서학과의 연결 고리는 있을까요?
이런 질문들을 던지면서 『여유당전서』 시문집을 읽다가, ‘먼저 가신 둘째 형(정약전) 묘지명’에서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 함께 나누어 보려 합니다.
“공은 섬으로 온 뒤부터는, 더욱 술을 잘 마셔서, 물고기 잡고 새 잡으며 살아가는 (거친) 사람들을 동료로 삼아, 다시는 교만한 귀인으로 처신하지 않으니, 섬의 백성들이 아주 좋아하여 서로 다투어 (손님 아닌) 주인으로 모셨다.” (『與猶堂全書』 卷15, 先仲氏墓誌銘. 「公自入海中 益縱飮 與魚蠻鳥夷爲儔侶 不復以驕貴相加 島氓大悅 爭相爲主」)
위 인용문은 정약전의 서거 다음에 바로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섬 사람들에 대한 독실한 행실을 설명하는 사례인데, 흑산도 입도 이후, 그의 실제 삶을 볼 수 있는 핵심 기록이 됩니다. (그런데 겉보기에 평범하다 할 수 있는 이런 ‘스스로 가난한 자로서의 삶’의 모습을 중요하게 기록하는건, 학문하는 사대부들 묘지명에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기록이, 이분의 실사구시의 삶과 어떤 연결성을 가졌을까 하고 생각해 보다가, ‘실(實)’은 보통 현실, 실제, 진실이라는 뜻으로 쓰지만, ‘열매’ ‘결실, 열매 맺다’로 쓰는 때가 더 많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습니다. (사실 ‘실학자’란, ‘실없는 사람’들이 아니라 ‘실있는 사람’들이겠지요.)
그렇다면, ‘실사구시’는 일반적으로 ‘현실에서 올바름을 구한다’고들 해석하지만, 실은 ‘열매 맺는 삶에서 올바름을 구한다’고 해석해야 제대로 맞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기는 성리학자들은 주자의 ‘옥산강의(玉山講義)’를 읽으면서, 쭉정이의 삶 아닌 알곡의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네요(*禮의 경지).
그런데, ‘열매맺는 삶’에 대해서는, 성경에도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요한은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는 군중에게 말하였다. '독사의 자식들아, 다가오는 진노를 피하라고 누가 너희에게 일러 주더냐?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라.'" (루카3, 7-8)
그냥 진심으로 ‘회개하라’라기 보다는, (하늘로부터 오는) 회심을 통한 독실한 행동으로 ‘회개의 열매를 맺어라’입니다.
여기까지 생각하고 보니, 다산이 위 기록을 남긴 이유가 새롭게 분명하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다산은, 유학자이면서 서학자였던 정약전의, 가난한 이웃(흑산도민)에 대한 회심, 곧 스스로 목마른 자가 됨으로써 나온 행위의 결실, 그로 인해 드러난 명성을 후세에 전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열매맺는 실사구시적 삶의 한 모습을 전하는 것이기도 하겠네요. (정조 임금이 강조한 '백성은 나와 한 핏줄(民吾同胞)'의 실천이기도 합니다.)
다산의 언어로 바꾸면, 둘째 형 정약전은, 하늘이 사람들에게 부여하는 영명(靈明)한 마음인 인(仁)에서 발하는 행위, 곧 ‘서(恕=如+心)’를 자신의 삶에서부터(推恕), 항구하게(忠恕), 힘껏(强恕) 실천했다고 해석됩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전근대 사람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실사구시’를 ‘(밝게) 열매맺는 삶을 추구한다’로 받아들여 실생활에서부터 실천했다고 봅니다. 반면에 요즈음 사람들은 실존철학 등등의 영향으로, ‘현실에서 진실을 추구한다’는 학문적 명제 정도로 편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다산의 글을 가지고 판단한다면, 전근대인들의 ‘실사구시’는 ‘현실(實事)에서 올바름을 구한다’이기보다는, (하늘이 부여하는 영명한 마음으로) ‘열매 맺는 행위(實事)에서 올바름을 구한다‘가 더 적절할 것입니다.
다산의 다음 글들도, 그와 같은 맥락으로 읽어보면, 그 뜻이 더욱 쉽고 깊게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권철신 묘지명> 천진암, 주어사 강학 이후, 권철신이 가족, 제자들과 삶을 함께 나누는 모습.
“집에서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벗이든 형제든 한 몸처럼 양육하며 그의 제자들도…동포 형제로 대하고, 그의 집에 열흘을 머물든 한달을 머물든 …곡식이나 재물도 공동으로 써서 멋대로 구별하지 않고, …좋은 음식은 적은 양이라도 하천(노복)에까지 균등하게 나누어 먹었다. …그의 부모형제와 벗에 대한 독실한 행실은 비록 비방하고 배척하는 자라도 가려버릴 수 없을 것이다” (『與猶堂全書』 卷15, 權哲身墓誌銘, 「居家唯順父母 養志友昆弟 如一身 是務是力 凡入其門者…如同胞昆弟… 留其家踰旬越月 …田園穀粟之藏 互使胥用 漫無界別 …遇有珍味 雖所得尠少 必銖分寸析 惠均下賤 以故 …其孝友篤行 雖詆斥者 不能掩也」)
<만일암 중수기> 승려 두운이 나이가 들어서, 뒷 사람들과 삶을 함께 나누려는 모습.
승려 두운(斗雲)이 그 집을 새롭게 꾸미고 크게 넓혀 준공을 하자, 다산(茶山)에 있는 초당으로 나를 찾아와 말하기를, "이 지방에 있는 절만 해도 바둑판에 바둑알 벌려 놓은 것과 같아. 절의 종소리와 북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니, 가는 곳마다 내 집이 아닌 곳이 없습니다. 이제 나도 머리카락이 다 빠져 늙은이가 되었는데, 내가 비록 어리석으나 어찌 이런 (버려버릴 하찮은) 일을 하겠습니까? 다만 잘 보수하여 뒷사람들에게 남겨 주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그의 말을 선하다 여겨 글을 짓고, 그 집 이름을 물어보니, 두륜산의 '해를 잡아당기는 집(挽日菴)'이라 하였다.
(『與猶堂全書』 卷13, 重修挽日菴記.「浮屠斗雲 新其室而大之 旣竣 過余于茶山之館而語之曰 蘭若之在域中者 如棋布楸 鍾鼓之聲相聞 無適而非吾室也 而吾之髮已種種 吾雖愚 豈爲是哉 聊繕之以遺後人 余善其言而識之 詢其室 曰頭輪山之挽日菴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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