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문학과 역사

분노나 '한'의 정치보다 청량함의 정치이기를

써니2022 2005. 7. 10. 14:51

 

 

                                    <청량산 탁필봉 -청량산인 퇴계가 즐겨 찾던 곳>

 

  요즈음에는 우리 한국인, 한국사회의 창조성, 창의성의 원동력인 삶의 원형질적 체험이 과연 어떤 체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볼 때가 많습니다.

 

  특히 일제 때 어떤 일본인이 이야기했다는 '자각된 한(恨)'을 품고 사는 삶에 바탕한 지사(志士)로서의 삶이 지닌 창조성, 창의성을 말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데 생각이 미치면 자주 깊은 상념(傷念)에 빠지기도 하죠. 지금처럼 과거사 청산이 강조되는 시기에는, 이 역시 가치있는 삶이기는 하지만, 어쩌다가 '진보'를 표방한 세상이 이렇게 싸움판이 되었을까요?

 

  우리나라는 역사 저멀리 15-16세기 왜란과 호란 이후, "부득이한 시절을 만나, 한(원한)을 품어 아픔을 참아낸다(含怨忍痛 迫不得已)"는 여덟 글자의 주자(朱熹) 말을 따르는 지사로서의 삶, 다시 말하면 중국인 국가가 고난받던 시절의 삶의 모습이, 그대로 몇백년 동안, 조선의 시대정신을 이끌어오던 시절이 있었죠.

 

  이 체험들이 20세기 전후에, 한말 서양-일본 제국주의적 침략군에 대항한  동학농민-의병-독립운동가-세계전쟁적 체험들로 인해 되살아나면서 아직 그대로 이어져오는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기는 합니다.

 

  하지만, 과연 과거 우리나라 사람들의 창의적 체험을 담보하는 원형질적 삶의 모습이 이러한 지사적 삶의 모습들에서만 연유하는 것일까요?

 

  다시금 생각해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예컨대 조선식 성리학을 처음 정착시키고, 그 삶의 모습대로 제자를 키워낸 퇴계 이황은

  스스로를 '청량산인(淸凉山人)'이라고 호를 붙이고, 그렇게 자연과 함께하며 살았다. 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시조를 남기기도 했죠.

 

 '청량산 육륙봉을 아나니 나와 백구

  백구야 말 옮기랴 못 믿을건 복사꽃 배꽃이로다

  복사꽃 배꽃아 떨어지지 마라 나무꾼(어부자) 알까 하노라'

 

  혼란하기 짝이 없는 분열된 중국 남북조시대를 살면서도, 맑고 담백함을 지키고 싶어했던 도연명의 도화원기 이미지를 빌려, 규모는 작지만 그 삶에 적용할수 있는 조선식 주자성리학을 깨달은 후에, 한나절 즐겨 홀로 거닐 수 있는 규모 작은 조선국의 청량산에 붙여서 읊었던 거죠. 

 

  당시 많은 인물들의 솔직한 평을 남겼던 율곡 이이는 퇴계를 만나보고 나서,

 '비갠 후 구름을 뚫고 나타나 비추는 밝고 맑은 달(霽月)' 같은 분이었다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퇴계의 학통이 계속 이어질수록, 퇴계의 삶에 대한 재평가는 계속 이어졌지요. 왜란과 호란 이후 시대 조선인들은, 예컨대 채제공 같은 분들의 시를 보면, 당시로서는 가장 강력한 세계제국이었던 중국 청나라의 크고 화려한 삶의 규모에 비교하여, 조선의 삶의 규모를 청량하고 맑은 삶의 규모라고 대비하면서, '청류(淸流)=맑고 청량한 흐름'을 특히 좋아하기도 했지요.

 

  아마도 큰 뜻을 실현하기 위한 '한(恨)을 품음=함원(含怨)'과 비교하면, 그나마의 삶조차도 헐벗어 버린 바보 같은 삶처럼 보일지는 모르겠으나...

 

  그래서인지 황동규 시인은 그의 시 '달밤'에서

  '두팔 들고 얼음을 밟으며

   갑자기 구름 개인 들판을 걸어갈 때

   헐벗은 옷 가득히 받는 달빛, 달빛.' 이라 읊기도 했습니다.

 

 모 당에서 노 대통령에게 고언한 '분노의 정치를 거두라'는 뜻 자체는 의미가 있지만, 그 '분노의 정치'가 지니고 있는 창조성, 창의성까지 부정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침략을 당한데다가 원치않는 전쟁을 부득이하게 참고 치러온 우리 역사 체험들을 통채로 부정하는 것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그대신 이제는 '청량한 정치를 해 봅시다' 하는 보다 시원한 제안이 (아마도 시간은 많이 걸리겠지만) 좀더 설득력 있다고 봅니다. 이 역시 우리 민족체험에서 나오는 심성에 맞기 때문이죠.

 

  '한(恨)'을 품고 사는 삶이 되살아 나기보다...

  '맑음(淸流)'을 품고 사는 삶이 되살아 나기를을 기대해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