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문학과 역사

진달래꽃길과 벚꽃길

써니2022 2005. 7. 19. 17:35

 

1.

 

  봄은, 많은 선남선녀들이 정든 님 가시는 길에 '영변 약산의 진달래꽃을 아름 따다 뿌리겠다'는 김소월의 시를 애송하는 계절입니다. 이 시는 1922년 발표되었고, 일제의 식민통치 아래에서 망국의 한(恨)을 달래던 그 시절 이래 널리 기억되어 왔죠.

 

  18세기 실학자 이중환이 쓴 <<택리지>>를 읽어본 사람들은, 시인의 고향 영변 지방의 역사적 개성을 음미해 보다가 새삼 놀라기도 합니다. 영변은 지세가 대단히 험준해서 그 중심지인 약산에는 외국 군대의 수많은 침략에도 전혀 함락된 적이 없어서 '철옹성(鐵壅城)'이라 불려온 성채가 있다고 쓰여 있다는 사실 때문이죠. 게다가 그 뒤에 우뚝 솟아있는 묘향산은 백두산처럼 태백산(太白山)이라고도 불리면서, 우리 민족의 시조인 단군 왕검께서 하늘로부터 내려온 성스러운 곳이라고 축복되어 왔습니다.

 

  이런 사실을 감안하여 다시금 생각해 보면,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밟고 가시옵소서'라는 이루어질 수 없는 첫사랑의 애수에 젖은 것처럼 느껴지는 가락 속에는, 영변의 약산에서 맺어진 철옹성과도 같은 약속, 옛날옛적부터 이어져 온 운명공동체라는 '미래를 약속하는 희망'이 그 바탕에 깔려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죠. 이는 일찍이 신라시대부터 전해 내려오는 '고향의 노래(鄕歌)', 예쁜 수로부인에게 '나를 아니 부끄러워 하신다면' 낭떠러지 절벽에 핀 진달래꽃을 꺾어 바치겠다는 노인의 젊은 노래 가락과 같이, 좋은 낭만적 시가가 지니고 있는 특성이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김소월의 이 시가 당시 우리를 떠나가는 모든 님에게 진달래꽃이 화사하게 피어있는 약산의 오솔길, 곧 진달래꽃길에서 함께 노닐던 추억을 영원히 간직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금 생각해보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특히 요즈음은 그런 것 같습니다.

  이는 산길이 곧 보통 길이라서 옛 사람들이 봄에는 주로 진달래꽃길을 걸었다는 생활 체험이 지금 사람들에게는 없어져버렸기 때문이기도 할 겁니다. 진달래꽃 하나 하나는  연분홍색에 그 윤곽조차도 아지랑이꽃처럼 희미해서 우리에게 확실하게 다가오지 못하지만, 산비탈에 흐드러지게 피어날 때는, 그 전체가 중첩되어 쌓인 연분홍 붉은 불꽃들이 돌더미를 쌓아 놓은 성채의 자태로 우리 마음에 다가온다는 추억을 이제는 잊어(잃어)버렸기 때문일 겁니다.

 

  그 대신 우리는 이제 탄탄대로나 잘 가꾸어진 정원길로 이어지는 '천공(天空)의 벚꽃길'이라는 체험과 추억을 안고 살죠.

 

  실은 김소월이 살던 그 시절이 바로 보통사람들이 걸어다니던 오솔길이 탄탄대로로 바뀌고, 한국식 정원이 일본식 정원으로 바뀌면서, 조선 백성들의 '흙바닥꽃(정공채)'인 진달래 꽃길이 없어지고, 대신에 일본 사람들의 나라꽃인 하늘 위의 성채와도 같은 벚꽃길이 생겨나던 시절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전국에 군사용 탄탄대로를 뚫고 군사기지를 만들면서 진해 벚꽃길 같은 추억을 만들고, 조선총독부를 웅장하게 세우면서 조선 국왕의 궁궐 하나를 동물들도 함께 노니는 창경원으로 만들어 일반인에게 개방하고서 벚꽃길 축제를 개최했던 일본 사람들의 정서 때문이었죠.

   일본인들은 이를 조선 사람들에게 주어진 근대화의 축복이라고 말하기도 했지요.

 

   그런데 이러한 역사적 사연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활 공간 -학교 교정이나 공원 등지에는 벚꽃길은 여기저기 많은데, 진달래꽃길은 거의 눈에 뜨이지 않습니다. 아마도 산에 사는 진달래는 옮겨 심어 살리기가 무척 어려운 꽃나무이기 때문이기도 할 겁이다.

 

   지금 진달래꽃이 우리 생활 공간 안에 들어와 있다면, 민족의 굳건한 정서를 잘 보여주는 진달래꽃길을 더 잘 가꾸어서 우리 공동체의 상징으로 만들어 보자는 캠페인을 벌여도 좋을 겁니다. 한편으로는 이제 우리 정서 속에 제대로 자리 잡은 벚꽃길의 화사한 체험 역시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다고 해도 좋을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민족의 정서 속에 진달래꽃길이라는 삶의 정취가 있었기 때문에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이 애송되었다는 역사감각은 보존하고 있어야 할 겁니다. 역사란 우리가 기억해야 할 체험과 잊어버려야 할 체험을 구별하는 감각이기도 하니까 말이죠.

 

 

  2.

 

  그러고 보니, 박희진 시인이 '기슭에서 정상까지 새봄의 꽃불 잔치(북한산 진달래)'라고 읊은 것처럼, 요즈음 산행(山行-등산)과 거기서 얻을 수 있는 호연지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아지면서, 다시 진달래꽃길의 체험들이 되살아나고 있기도 하네요.

 
  하기는 우리 산야에서 가장 두드러진 봄꽃인 진달래꽃은 갓 독립을 해서 우리 젊은 공화국이 출발하던 해방공간에서는, 일제와 무장투쟁을 했던 젊은 독립투사들의 산악전투 추억으로 해서 특히 사랑받던 꽃이기도 했으니까요.
  그 이후에도, 김광규 시인이 '굳어버린 껍질을 뚫고... 진달래꽃 피어나는 아픔(아니다 그렇지 않다)'이라 읊은 것처럼, 박선욱 시인이 '5월 진달래는 지지 않는다'고 읊은 것처럼,  4.19에서 10.18로, 그리고 5.18로 이어지는 민주열사의 꽃으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통일을 준비하는 새로운 한국의 건설이 필요하다고 이전보다 실감나게 외치고 있죠. 곧 다시 젊은 공화국 정신이 요구되고 있는 겁니다. 하지만 (한 두번의) 투표 등으로 바꾸기에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겉늙은 공화국의 유산이 우리 공동체에 마치 원죄처럼 뿌리깊게 남아있는 것도 현실이죠.
 
  사정이 그러하니,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일제 치하에서 고통받는 민족의 한(恨)을 잘 표현해서 우리에게 불멸의 꽃으로 남았다기보다, 우리 역사공동체 체험까지 감싸안은 철옹성 같은 미래의 희망(Creating Desire)을 읊은 호연지기로 해서 우리에게 불멸의 꽃으로 남았다는 또하나의 사실을 다시금 음미해보는 것도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리하여 새천년의 새 봄에는, 패기와 독창성 그리고 기억해야 할 젊은 전통들을 보다 존중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특히 미래를 준비하는 우리 젊은 호연지기들이 진달래꽃길과 같이 새롭게 피어나기를 특별하게 기대합니다. 그리고 그 축복으로, 우리나라 동서남북 방방곡곡에 전통과 경륜의 한국인이라기보다 젊음과 개성의 한국인이라는 은총을 모두가 받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2000년 4월 1일자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