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문학과 역사

국화 옆에서와 리승만 -길들여지지 않는 바람에 대한 예찬

써니2022 2005. 11. 4. 01:16

 

    

 1. 

  “한 송이의 금빛 국화가 새벽 이슬에 맑게 피어나기 위하여, 간밤의 무서리가 내리더라는 시 「국화」가 생각납니다.” 이는 신영복 님의 수필집 <<나무야, 나무야>>에 나오는 구절이죠. 독자들은 당연히 서정주(徐廷柱) 시인의 유명한 시 「국화 옆에서」에 나오는 ‘노오란 네 꽃잎이 피려고 / 간밤엔 무서리가 저리 내리고’ 하는 싯귀를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놀라지 마시라, <<나무야 나무야>>에서는 중국 당나라 중기를 대표하는 시인 백거이(白居易, 호 樂天, 772~846)의 시라고 밝혀 놓고 있습니다.

  백낙천의 국화 시는 3편 정도가 전해지는데, 신영복 님이 생각한 국화 시는 아마도 시인이 50세 전후에 쓴 「중양절 자리에서 하얀 국화를 읊다[重陽席上賦白菊]」는 제목을 가진 시의 한 귀절(滿園花菊鬱金黃 中有孤叢色似霜)이라고 생각됩니다. 백낙천 국화 시의 발상은 금빛 노오란 국화 중에서 한 송이가 홀로 우뚝 서서 무서리를 맞은 채 피어나서 백발로 덮인 흰 국화처럼 보인다고 해석할 수 있으므로, 「국화 옆에서」의 발상과 기본적으로 일치한다고 봅니다.

  다시금 생각해 보면, 사실 국화(菊花)는 조선인과 중국인, 일본인 모두가 그토록 좋아해서 오랫동안 수없이 시로 읊어왔던 꽃이죠. 그러니 이제까지 읊어진 국화 시를 한군데 모아 놓는다면, 특히 서리맞고 피어나는 국화 같은 이미지는 유사하거나 꼭 같은 경우가 상당히 많이 나올 것이 틀림없죠. “풍상이 섞어친 날에 갓 피어난 황국화를”로 시작하는 송순(宋純, 호 俛仰亭, 1493~1582)의 옛 시조를 우리가 아직도 가르치고 기억하고 있듯이, 모 지하철역에 같은 이미지를 잘 차용하여 자기 소회를 읊은 임진왜란 때 의병장 조헌(趙憲)의 한시가 벽을 장식하고 있듯이,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사람이라면 모두 함께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정서, 이를 뒷받침한 동Asia 문화가 지닌 삶의 모습들 때문일 겁니다.

  그렇다고 해도, 중국의 백낙천이나 우리나라의 서정주 정도로 뛰어난 시인들의 시라면, 이 귀절의 유사성을 그저 우연하게 일치한 이미지의 유사성일 뿐이라고 단순하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서정주 시인은 민족적 정서를 노래한 대표적 시인이라고 자타가 인정하고 있으므로 포스트모더니즘 시인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만, 서정주와 백낙천의 ‘국화’ 시에서 나타나는 싯귀의 유사성은 분명히 요즈음 포스트모더니즘에서 말하는 ‘혼성 모방’ 기법에 해당된다고 보아야 할 겁니다.

 

      2.

  가을에 늦게 피는 국화 꽃이 지닌 가장 보편적인 이미지는 무엇일까요? 

  서정주 시인의 수필 「국화」에서는 “단군 할아버지의 어머님께서 사람 노릇하다 식품으로 삼았다는 그 시골 중의 시골의 풀 -쑥과 한 계통의 냄새여서 좋다”고 말하고 있죠. 중국의 전통적인 명절로서 우리 옛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중양절(重陽節)에는 많은 사람들이 단풍과 국화를 즐기러 산과 들로 나 다니는 것이 오래된 풍습이죠.

  곧 이런 생활공간 속에서 오랜 역사를 관통하여 지금까지 전해지는 문학 작품들을 살펴보면, 국화꽃은, 봄에 일찍 피는 진달래꽃[杜鵑花]과 같이, 산과 들에 놀러 나가서 화전(花煎)으로 만들어 먹고 꽃을 따다가 국화주를 담구어 먹는 서민적이고 일상적인 이미지를 가진 ‘먹는 꽃’입니다. 들국화에서부터 시작되어, 품종 개량이 이루어졌기 때문이죠. ‘국화는 먹는 꽃’으로 2연을 시작하는 박남수(朴南秀) 시인의 「국화」 시도 있습니다. “나는 그대를 따라갔어요, 밝은 곳에서 부르는 / 자스민 향기의 환한 손짓에 따라…”라고 읊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시처럼, 서양에서는 차에 넣어 먹는 자스민 꽃[茉莉花]이나 레몬 꽃이 국화 같은 그런 친근하고 일상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죠.

  우리나라에서의 국화꽃은 대자연 속에서 온갖 풍상을 견디어내며 추운 날씨에서도 홀로 피어나는 품성을 높이 삽니다. 이 때문에, 조선 시대이래 ‘높은 뜻을 지키기 위해서 자신의 존재를 숨기면서 살아가는 은자(隱者)’, 곧 한 사람의 서민으로 살아가는 뜻 높은 선비라는 이미지를 특히 좋아했죠. 그래서 “국화야 너는 어이 삼월동풍(三月東風) 다 지내고/ 낙목한천(落木寒天)에 너 홀로 피었느냐/ 아마도 오상고절(傲霜高節)은 너뿐인가 하노라”는 이정보(李鼎輔, 호 三洲, 1693~1766)의 유명한 시조도 전해내려 옵니다.

   높은 품성을 가졌다는 국화 이미지는 동Asia의 오랜 전통과도 이어집니다. 백낙천보다 400년 전 동진(東晉)의 시인 도잠(陶潛, 호 淵明, 365?~427)의 유명한 시 「음주(飮酒)」에 나오는 “동쪽 울타리 아래에서 국화를 꺾다 보니 문득 남산이 눈앞에 다가왔다[採菊東籬下 悠然見南山]”라는 싯귀에서 나타나는 ‘심원(心遠)의 정신’ 또는 ‘천지(天地)의 마음’을 지닌 대장부 선비 모습에서 연유한 것이기도 합니다.

  반면에 일본에서는 자연으로 돌아가게 하는 꽃이라기보다 일본 황실의 꽃이었죠. 오랜 세월의 여정을 거치면서 잘 손질되어 고귀하게 우러러 보이는 품성을 높이 산 때문이었습니다. 곧 국화는 명치유신 이후에는 권력의 정통성을 지닌 최고 통치자인 ‘천황’을 상징하는 이미지를 가졌고, 2차 세계대전 전후부터는 벚꽃과 대등한 나라꽃[國花]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중에 집필되기 시작한 유명한 일본 연구서적인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의 <<국화와 칼>>에 나오는 “작은 화분 속에 재배되어 그 꽃잎 하나 하나에 정성 들여 가지런히 손질 받은 국화”가 일본 문화를 대표하는 상징이라는 지적은 특히 잘 알려져 있죠. 일본 최고 수준에 드는 단편소설로 인정받는 하야시 후미코(林芙美子, 1903~1951)의 「철 늦은 국화」는 1948년에 발표되었는데, 여기서도 고난의 세월을 겪은 55세라는 나이로 해서 “대단한 분별력을 가진 …자세 하나 흐트러뜨리지 않는 단아한 표정”의 여인을 국화로 묘사하고 있기도 하지요. 마치 ‘거울 앞에선 누님'과 같이... 

 

     3.

  그런데, 서정주의 「국화 옆에서」에서 나오는 국화는 어떤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까요? 먹는 꽃이므로 서민적이라든가, 서민으로 숨어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뜻이 높은 대장부 선비라든가 하는 이미지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풍상을 다 겪어서 인품이 완성의 경지에 이른 우러러 보이는 낯익은 노인,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과 같다는 이미지가 「국화 옆에서」의 이미지죠. 우리는 이러한 국화꽃과 같은 존재로서, 어떤 평론가의 말대로 민족 시인으로서 문단의 원로인 서정주 시인의 모습을 보통 떠올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역사적 시간이라는 관점을 써서 「국화 옆에서」를 분석해 보면, 무엇보다도 이 시를 쓰고 발표한 시점이 아주 중요합니다.

  서정주 시인 자신은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해방 공간인 1946년 가을에 썼다고 회상하고 있지만, 1947년 가을(11월 9일) <<경향신문>>에 발표함으로써 최종적으로 완성되었죠. 당시 시인은 32세였으므로, 노년은커녕 중년이라고 말하기에도 아직 젊다고 해야 할 때죠. (1940년대는 요즈음보다 평균 수명이 짧아서 30세만 넘으면 중늙은이로 자처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는 합니다.) 곧 초겨울까지 피는 꽃을 상징하는 「국화 옆에서」의 국화 이미지는 결코 서정주 시인 자신의 이미지일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전통적 이미지도 아니었다면, 과연 그는 누구였을까요? 서정주 시인이 생각했던 ‘모든 풍상을 다 겪어서 인품이 완성의 경지에 이른 낯익은 노인으로서 친근한 누님’과 같은 사람이었을 겁니다.

  1946년~1947년 가을이라는 해방 공간에서의 이 사람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이는 「국화 옆에서」를 쓰던 시절의 서정주 시인이 1947년 여름부터 이승만(李承晩)의 집에 드나들면서 대담을 하고 자료를 모으면서 전기를 집필하여 <<민중일보(民衆日報)>>에 연재하고 있는 중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민중일보>> 사장으로서 「이승만박사기념사업회」 회장을 맡았던 윤보선(尹潽善)의 이승만 전기를 집필해 달라는 부탁을 즐거이 수락했기 때문이죠.

  이승만을 만날 당시 서정주는 “20세기 우리 민족 독립운동의 제일 원로…적어도 하늘의 서자 환웅의 아드님ꠏꠏ 단군 비슷한 모습에, 그렇지, 적어도 그리이스의 신들의 우두머리ꠏꠏ 제우스만큼은” 될 것으로 상상하고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이승만을 추앙하고 있었죠. 당시를 회상하여 쓴 서정주의 글 「이승만 박사의 곁」(<<서정주문학전집>>3)을 읽어보면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옵니다.

  “그(이승만)와의 반 해쯤의 접촉은 내게는 은근히 큰 힘이 되었다. 늘 짓눌리면서도 끈질기게 뚫고 나온 민족혼의 상징을 그에게서 가까이 느끼고, 일정 말기 한때의 엉터리였던 내 오판을 대조해 보고, 다시 살 마련과 용기를 내 속에 일으키는 데에 아주 큰 힘이 되었다.”

  ‘은근히 큰 힘이 된, 늘 짓눌리면서도 끈질기게 뚫고 나온 민족혼의 상징’... 이게 바로 「국화 옆에서」의 국화 이미지죠. 그래서 우리는 향그럽고 사랑스러운 「국화를 먹으면서」라든지, 평범해 보이지만 뜻이 높은 「국화와 말하면서」라는 제목이 아니라, 친근하게 우러러 보이는 「국화 옆에서」라는 제목을 붙였는지 하는 이유도 더불어 짐작해 볼 수 있죠.

  곧 서정주 시인이 쓴 위의 글로 해서 우리는 왜 하필 1947년 11월이라는 시점에서 「국화 옆에서」를 발표했는지를, 그리고 후일 이승만을 회고하는 수필의 제목을 왜 하필 「이승만 박사의 곁」이라고 붙였는지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서정주가 쓴 이승만 전기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 주장이 승리하여 이승만이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선출된 직후인 1948년 말에 발간되었지요. 그러나 이대통령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여 모두 압수․판금조치 되었고(1995년 다시 출판됨), 이후 서정주는 ‘아는 것보다는 즐겨야 했을 인물(「내가 본 이승만 박사」)’이라는 의미심장한 평가를 남겼지요.

  곧 역사적 시간을 쓰는 방법으로 분석해 보면, ‘국화 누님’으로써 말하고자 하는 이미지는 바로 당시 최고 권력자가 되기 위해 1946년 6월 정읍(井邑) 발언을 통해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라는 길로 가게 될 수밖에 없다고 주창하면서 권력 투쟁의 전면에 나섰던 정치인 이승만의 이미지와 완전히 일치한다는 개연성 부분이 특히 중요합니다. 전통적 국화꽃의 이미지인 서민적인 먹는 꽃이라든지 서민 속에 숨어 있는 지사(志士)라는 이미지를, 일본의 국화꽃 이미지와 가장 가깝게 연이 닿는다고 할 수 있는, 최고 통치자로서 모든 풍상을 겪고도 분별력 있는 단아한 자세를 지켜서 친근하게 우러러 보아야 할 존재라는 이미지로 바꾸어 놓았던 겁니다. (후일, 서정주 시인 자신은 수필 「국화」에서 40세쯤 먹은 국화 누님 같은 분 -針母, 菊花宅- 을 회상하기도 했는데, 이는 하야시 후미코의 ꡔ철늦은 국화ꡕ로 상징되는 연상의 여인을 생각나게도 하죠.)

  정치가, 곧 최고 지도자로서의 이승만의 이미지메이킹을 지원하기 위한 숨어있는 또 하나의 의도를 가진 시가 곧 「국화 옆에서」였다면, 우리 민족의 정서 속에서 보편적으로 공유하는 국화 이미지와는 상당한 거리가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니 민족적 정서를 이용하되, 이를 이승만의 이미지메이킹에 맞는 정치성을 지니는 시로서 재창조하였다고 해야 할 겁니다.

  여기서 우리는 ‘국화 옆에서’가 정식으로 발표되기 이전인 1947년 1월에, 일제시대부터 뛰어난 활약을 보인 국문학자 김태준이, 그의 글 「단군론」에서 이미 “국수주의적 역사 등이 천조대신(天照大神) 대신에 단군(檀君)을 가르치고, 왜천황(倭天皇) 대신에 이승만(李承晩)을 우상화하고 있으며…”라고 경고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됩니다.

  당시 권력 주도권 쟁탈을 둘러싼 정치적 이미지메이킹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서 조금 더 덧붙여 설명한다면, 해방공간에서는 봄에 피는 진달래꽃이 무기를 들고 국내와 국외를 오가면서 무장투쟁을 했던 젊은 독립투사를 상징했다면, 가을에 피는 국화꽃은 머나먼 외국에서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끝까지 독립운동을 포기하지 않았던 나이든 독립투사를 상징했다는 겁니다.

 

     4.

  「국화 옆에서」가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위해서도 썼다는 숨겨진 의도가 들어있다면, 지식인 서정주 시인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 봄부터 소쩍새는 / 그렇게 울었나 보다 /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 또 그렇게 울었나 보다 / 머언 먼 젊음의 뒤안길에서 /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같은 싯귀들이 지니는 이미지도 역사적 방법으로 다시금 분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싯귀의 이해를 위해서는 서정주 시인이 젊어서 문단에 등단했을 당시부터 나타나는 지식인으로서의 본질 역시 파악해 보아야 할 겁니다.

  왜 강요받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적극적인 친일(親日) 행위를 했느냐는 질문에 대한 답변, ‘일정 말기 한때의 엉터리였던 내 오판(誤判)’, 곧 “일본이 그렇게 쉽게 항복할 줄 몰랐다. 못 가도 100년은 갈 줄 알았다.”는 서정주 시인의 고백은 아주 유명하죠.

  그런데, 그의 이러한 지식인으로서의 본질적 세계와 민족 시인으로서의 시적 세계는 전혀 별개의 문제일까요? 결코 그렇게만 파악할 수는 없으니, 분명한 연결성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겁니다.

  그렇다면 친일과 연결되는 지식인 서정주 시인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이는 그의 출세작들과 스스로 자신을 읊은 「자화상(自畵像)」들을 통해서 분석해 볼 수 있습니다.

  1936년 11월 ꡔ시인부락ꡕ 창간호에 발표한 시 「문둥이」에서 서정주 시인은 “해와 하늘 빛이 / 문둥이는 서러워 / 보리밭에 달 뜨면 / 애기 하나 먹고 /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고 읊었습니다. 보통 사람에게는 아주 친근한 존재인 해, 푸른 하늘, 보리밭, 꽃, 달, 애기와 같은 현재와 미래를 관통하면서 연결시켜 주는 공동체 체험인 고향의 이미지들, 길들여진 희망이라는 따뜻한 이미지들이 문둥이에게는 도리어 길들여진 세상에서 유배되었다는 이질적 존재라는 정서를 더욱 부추긴다는 거죠. 이 세상의 주인인 천상의 족속이었다가, 하루아침에 파괴되어서 지상족으로 떨어져버린 족속이 지니는 이미지이죠.

  1939년에 쓴 시 「자화상」에서는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기퍼도 오지 않았다. / … / 스물세해 동안 나를 키운건 팔할이 바람이다. / … /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진 안을란다.” 라고 읊고 있었습니다. 이는 한 단계 더 나가서 ‘길들여진 애비’보다는 ‘길들여지지 않은 바람’에 대한 찬양 노래입니다. 곧 길들여지지 않은 이질적인 공동체와의 대면에 대한 개척론과 예찬론을 노래한 거죠.

  이런 시적 이미지들을 미지의 세계를 향한 정신의 모험이니, 존재를 거부하고 생성을 따르는 바람의 형이상학이니 하고 평가할 수도 있죠. 그러나 이 시들이 발표된 일제 치하에서 말하는 길들여지지 않은 바람이니 미지의 세계를 향하느니 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당시의 세계화론, 다시 말하면 민족이라는 길들여진 좁은 테두리를 넘어서서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의 맏형인 일본부터 배워야 하므로 친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한 사람들의 자기합리화론이죠.

  이상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지식인 서정주의 본질적 특징은 ‘길들여지지 않은 바람, 곧 이질적 공동체와의 대면에 대한 예찬’이라는 겁니다. 곧 이런 바탕 때문에 스스로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할 수 있었다고 해야 할 겁니다. 게다가 「국화 옆에서」에서 말하는 소쩍새 울음이나 천둥소리, 무서리, 젊음의 뒤안길 등이 지니는 이미지의 독창성 역시 이국적인 ‘길들여지지 않은 바람에 대한 예찬’이 그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5.

  어떤 평자들은 서정주 시인이 「국화 옆에서」를 발표한 이후 보들레르 류의 악마성 예찬 내지 서구적 원죄 의식에서 벗어나 비로소 한국인 심정의 원형으로 돌아갔다고 평가하기도 하죠. 그의 성공은 우리 문학의 성공이요, 그의 실패는 우리 문학의 실패라고까지 평가해야 한다고 역설하는 경우도 있죠. 오늘날 우리 문학 공동체의 현실 속에서는 그렇게 평가하는게 당연할 수도 있겠죠.

  그러나 역사적 시간이 품는 역사 공동체라는 현실 속에서는, 서정주 시인이 이전의 ‘엉터리였던 내 오판’을 이후 더 이상 반복하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순수 문학을 추구하는 시인이라고 자처하면서도 1966년 광복절에 발표한 「다시 비정의 산하에」라는 시에서는 “새로 나갈 길은 /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 베트남뿐이다 / 베트남뿐이다”라고 함으로써 월남전 참전을 독려하였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데올로기의 탈을 쓴 부패정권 지원이라든지 엄청난 후유증을 유발한 고엽제 사용 같은 부도덕한 전쟁이어서 패배를 자초했다는 사실이 이제는 익히 드러난 월남전 찬양은, 명백하게 3공화국 당시 이데올로기를 지원하는 친정부적 현실참여시입니다. 또 유신독재 종말 이후 표출된 국민들의 민주화 열망을 (일시적일 망정) 오뉴월의 무서리와 피바람으로 식혀서 날려버린 신흥 무장 세력들에 의한 5공화국 출범 시기에 국보위 위원이라는 과감한 현실 참여를 하기도 했죠. 사실이 그러하니, 우리 역사에 나타나는 ‘길들여지지 않은 바람에 대한 예찬’이라는 서정주 시인의 본질이 분명하게 바뀌었다고 단정해서 말하기도 참으로 어렵죠. 곧 일제침략 이후 우리 역사 공동체 속에서는, 아무리 순수 시인이라 해도 현실과 이데올로기에서 완전히 떨어져 있다든가 넘어서 있다든가 하는 사람은 사실상 없다는 것이 진실일 수밖에 없죠.

  서정주 시인의 「국화 옆에서」가 널리 애송되면서부터 국화는 청정한 자연에 속하는 서민적인 꽃이라는 이미지를 많이 상실했으므로, 박남수 시인의 「국화」시 처럼 전통 민족 정서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국화 이미지인 ‘대자연에 속하는 뜻 있는 서민’을 민중의 이미지로 다시 살려내는 이미지 투쟁이 필요하다든지 하는 이야기까지 나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앞으로 문학하는 분들이 해 주셔야 할 몫이죠. 

  그리고, 이러한 글쓴이의 분석과 관계없이, 그리고 시인의 숨겨진 의도와 관계없이, 「국화 옆에서」를 읽고, 애송하고, 자기 것으로 만들면서 자기 시대를 살아가는 보통 독자들의 현명함은, 정치 이데올로기를 넘어서는 민족적인 정서와 보편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국화 옆에서」를 재해석하고 재창조해서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도 분명하게 인정합니다.


   -2000년  5월 25일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