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가환 친필'
1.
이가환(李家煥)은 1801년 천주학에 물들었다 하여 역적으로 단죄되어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결국 그의 진면목을 파악할 만한 자료도 거의 없어져 버린 비극적인 인물이죠.
'황사영백서'로 판단하면 그는 천주교 신자로서 죽었지만, 추안을 위시한 사료를 전반적으로 검토해 보면 그보다는 당시 서양학문의 진정한 수준을 파악하는 것이 사회에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열심히 노력한 지식인이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1742년(영조 18년)에 태어나서 1801년(순조 1년) 신유옥사에 연루되어 심문도중 곤장에 맞아 죽었고, 묘소는 충청도
덕산(德山)의 장천(長川)에 있습니다.
이가환은 원래 여주 이씨가 대대로 거주했던 서울 서대문 근처인 정동(舊貞陵港)에
태어나고 생장하였습니다. 하지만 학문적으로는 성호 이익의 가학을 이은 정산 이병휴(貞山 李秉休)와 혜환 이용휴(惠寰 李用休)를 이은
대학자였습니다.
여기저기 흩어져 남아 있는 그의 글을 통해 파악해 보면, 이가환은 뛰어난 학자이자 정치가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죠. 그는 종조부인 성호 이익이 노력한 명말청초 경세학파에서 이어지는 백과전서적 박학풍의 학문을 이어서 대성하였습니다. 특히 암기력이 뛰어난
데다 독서를 많이 하여 보지 않은 책이 없을 정도였으므로, 고증을 하고 논거를 찾아야 하는 '대전통편(大典通編)', '춘관지(春官志)',
'갱장록(羹墻錄)', '규장전운(奎章全韻)' 같은, 주로 어려운 편찬사업에 늘 발탁되었습니다. 정조는 즉위초부터 이가환의 학문실력을 높게
평가하여 각별하게 대접하였고, 그의 문장을 육경고문에 근거한 당시 최고수준이라고 평가하였습니다. 문집으로 '금대집(錦帶集)' 10책이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 전해지는 문집은 약간의 시문을 수습한 정도에 불과합니다.
2.
이가환은 특히 서양학에 조예가 깊었으며, 특히 기하학에 대한 이해는 스스로 독보적인 수준에 이르렀다고
자부하기도 하였습니다. 일찍이 성호 이익은 서양 선교사들이 만든 세계지도를 보고서, 성인은 하늘을 대신하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사람이므로 이를
만든 마테오리치야말로 성인이라고 칭찬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이가환도 마찬가지 견해를 가지고 있었지만, 한걸음 더 나가 서양
선교사들이 저술한 서양학 서적은 그들이 창작한 것이 아니고 수많은 전문가들의 견해를 종합한 것이라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습니다. 이가환은 일찍이
서학 서적을 깊게 공부한 이벽과 논쟁을 한 후 '성년광익(聖年廣益)'이라는 성인전까지 읽고 나서, "만약 이것이 바른 길이 아니라면
서양선비[西士]는 바다를 건너오지도 못하고 벼락에 맞아 죽었을 것이다"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이익과 이가환의 이러한
견해는 당시 큰 파란을 불러일으켜서, 남인들 사이에서도 성호 문집 정본에 ‘마테오리치는 성인’이라는 내용이 실제 있었는지의 여부를 놓고 심각한
논란이 벌어지기까지 했었죠.
이익과 이가환이 한 말은 바로 전체 세계를 알 수 있게 해 주는 보편성을 지닌 문화가
세계문화[中華文化]라는 의미였습니다. 이 때문에 이가환은 서양인 신부를 조선으로 초빙해 오는 사업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이를 위해 자금지원까지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당시 다른 사람들에게는 천주교 세례를 받도록 권했으면서도, 자신은 중국에 있는 서양인 신부를 만나 본 이후에야 세례를
받으려고 했습니다. 이는 이가환이 서양학문의 진정한 수준을 파악하기 위해서 천주교를 연구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즉 서학이
보편성을 지닌 학문이라면 금지가 불가능하며 오히려 중국문화보다 보편적 수준에 도달했을 가능성이 있는 서학의 깊고 진정한 모습을 알아야 하므로,
서양인 신부 영입운동을 해야 하고, 서양 물자를 실은 선박을 초청해야 한다고 본 겁니다. 조선 역시 자신의 필요에 의해서 서양문화의 진면목을
알려고 했던 명나라나 청나라 정도의 수준에는 도달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자신도 중국에서 서학을 공부하여 대성한 학자이자 정치가 중에서,
서광계 같은 수준의 인물이 되기를 추구했다고 생각됩니다.
3.
정치적으로 볼 때, 이가환은 채제공의 충실한 후계자였습니다. 소론 준론 서명선을 영의정으로 하는 정권이
들어선 후 채제공이 집중공격을 받아 8년간 정계에서 물러나 있는 동안에, 오직 이가환과 정범조, 유항주 등 몇 명만이 흔들림 없이 끝까지
채제공의 입장을 지지하였다는 기록도 남아 잇을 정도입니다. 동시에 이들은 채제공과 개인적으로 친밀했으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적대하는 편에 가담한
목만중, 채홍리, 홍수보, 강세륜 등을 나쁜 무리라고 공격하였습니다. 게다가 이가환은 장희빈의 아들인 경종을 보호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노론
당국자를 공격했다가 죄인으로 죽은 이잠(李潛)의 종손이기도 했습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노론정파 인물로부터 아예 출신에서부터 음흉하고
난폭하다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즉 이가환을 싫어하는 정적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정조는 이가환을 탕평정치가
키워낼 수 있었던 인재라고 지목하여 각별하게 보호하였습니다. 그를 “깊은 골짜기에서 자랐지만, 스스로 높이 솟구쳐 오른 큰 나무”에 비유하기를
즐겨했습니다. 이는 영조가 채제공을 각별하게 보호한 뜻과 같았죠. 정조가 좀더 오래 살아서, 당시 남인들의 기대대로 채제공 뒤를 잇는 정승으로
이가환이 임명되었더라면 아마도 커다란 정치적 개혁이 뒤따랐을 것입니다. 이것이 정조가 사망하자마자 이가환이 죄인으로 몰려 매맞아 죽을 수밖에
없었던 진짜 이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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