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인물과 역사

순암 안정복의 생애와 사상

써니2022 2006. 7. 2. 19:14

 

 

'순암 안정복 친필'

 

  1.

  순암 안정복은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 민족주의 역사학자 신채호가 ‘몇 백년래 유일한 사학전문가’라고 평가한 인물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25세 때 광주군 경안면 덕곡(廣州 慶安面 德谷)으로 이주하여, 이후 이곳에서 일생을 공부하는데 바쳤습니다. 그는 집안이 가난하여 손수 초록한 책으로써 공부를 계속하였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언제나 메모해 두는 좋은 학자적 습관을 가졌다고 합니다.
  안정복은 숙종 말년인 1712년 음력 6월 충북 제천현 유원(堤川縣 楡院)에서 출생하여, 정조 중반인 1791년 7월에 타계하였습니다. 자는 백순(百順)이며, 순암(順菴)은 그의 호이고, 본관은 광주(廣州)입니다. 9세까지는 서울인 한성부의 청파리(靑坡里), 남정동(藍井洞) 등지에서 살다가, 영조 즉위 직후 조부인 안서우(安瑞羽)가 노론의 탄핵을 받아 파직된 후에 전라도 무주로 은둔하였습니다. 조부가 죽자 부친 안극(安極)을 따라 10여년을 거주한 무주를 떠나 고향인 광주 덕곡으로 이주하였는데, 안정복의 묘소도 이곳 덕곡에 있습니다. 그의 집안은 학문적으로는 경기도 지역 남인계 학통을 잇고 있으나, 사회적으로는 향촌의 사족 출신으로서 조선후기 이후 현달한 인물을 내지 못한 가문에 속했습니다.

  2.

  안정복은 처음에는 성리학보다는 박학다식한 백과전서적 학문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광주로 올라와서 '성리대전' 공부하면서부터는 성리학자로서 일생을 보냈다 합니다. 33세 때 겨우 유형원의 저술을 빌려 볼 수 있었고, 35세 때(1746년 10월) 안산으로 성호 이익을 방문한 후, 비로소 이익을 스승으로 모실 수 있었습니다. 이후 안정복은 이익 문하의 윤동규, 이병휴, 이맹휴들과 교유하면서 이른바 성호 우파 계열 학자들을 이끌어 갔습니다. 1754년 6월 부친이 별세하자, 이후 학문과 저술활동에 전념하였습니다. 말년인 61세 이후 남인계 재상 채제공의 추천으로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의 교육을 담당하는 서연(書筵)에 참여한 것이 계기가 되어, 65세 때는 벼슬이 목천현감에 이르렀습니다.

  현감 재직 시절에는, 나름대로의 아이디어를 최대한 내어서, 스스로 마을약속 또는 동네약속(鄕約, 洞約)을 만들어 주민들이 이를 실천하도록 적극 권장하였을 뿐 아니라, 국가의 세금납부제도를 합리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방역소(防役所) 설치, 마을 지식인 계층의 단결과 협조를 도모하기 위한 사마소(司馬所) 다시 설치 등 적극적인 향촌 교화시책을 편 것으로 유명합니다.

 

  3.
  한편 73세 이후 경기도 지역 남인 가운데 그의 사위 권일신(權日身)을 위시한 소장 학자들이 천주교 실천운동을 벌이자, 이를 강력하게 비판하였습니다. 그는 '천학고' '천학문답' 지어 천주교의 내세관이 지닌 현실부정적 입장을 비판하였는데, 이는 사회적으로는 성리학적 질서에 대한 옹호론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남인계열의 열악한 정치적 입지를 보호하려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는 개인문집인 '순암집(順菴集)'과 유명한 역사책인 '동사강목(東史綱目)'을 비롯하여 경세가로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임관정요(臨官政要)', 당시의 현대사인 조선시대사를 서술한 '열조통기(列朝通紀)' 등을 남겼습니다.

 

  4.

  순암 안정복의 대표적 저술은, 잘 알려져 있는대로, 20권의 '동사강목'입니다. 이는 안정복이 학문의 출발점을 인간 세상에 대한 공부라는 뜻인 하학(下學)에 두었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성을 가집니다. 당시 실천적 성격을 잃고 사변적 성격으로 변한 이기 논쟁, 심성 논쟁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실제 사실을 분석해 낼 수 있는 실학으로서 역사학에 집중하였던 겁니다. 그리하여 역사학을 현실적 실천으로 가기 위한 마지막 단계에서 공부하는 학문으로 분류하기도 하였습니다.
  '동사강목'은 스승인 이익의 권유를 받아 1756년 편찬에 착수하여 1759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이 책은 기존 역사서에 대한 철저한 비판작업을 바탕으로, 17세기 이후 축적된 강목체 방식이라는 성리학적 한국사 연구의 성과를 계승 발전시켜, 수준높은 종합을 이룩하였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받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안정복 생전인 정조 5년에 같은 당파도 아닌 소론 계열 승지 정지검(鄭志儉)에 의해서 정조임금에게 올려졌습니다. 또한 후일 한말 개화기의 역사가 및 민족사학자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 역사가들에게까지도 계속 새로운 영감을 떠오르게 하거나 새로운 아이디어를 생산하도록 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역사인식의 측면에서는 홍만종과 이익이 우리 역사의 출발은 단군조선이고, 그 역사적 후계자는 기자조선과 마한이라고 보는 단군-기자-마한정통론을 받아들이되, 그 이전 역사로서 존재하는 동이족의 역사를 함께 정리한 부분이 높게 평가됩니다. 이로써 현대 역사학에서도 이용할 수 있는 우리 역사의 시원에 대한 기초 자료 및 기본 인식이 정립되었습니다.

  한편 우리나라가 단군과 기자의 옛 영토인 요동을 차지하지 못한 것이 약소국으로 된 중요 원인으로 본 부분은 당시 소론계 학자 이종휘의 생각과 같은 것으로서, 당시 청나라에 대한 정벌 주장인 북벌론을 긍정했던 우리나라 보통 지식인들의 생각의 한 단면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사론에서 나타나는 과거제도 폐지론과 향촌 추천제 활용론, 법적으로 연좌제 폐지론, 노비제도 및 문벌제도 비판은 대체로 스승 이익의 학문적 방향과 일치합니다.
  역사 서술의 측면에서는 조선후기 이래의 역사지리학적 연구방법 및 고증학적 연구방법을 집대성하고 재해석한 서술의 보편성 획득 노력이 높게 평가된다. 특히 보통 역사에서 문제가 되어왔던 부분을 넓게 검토한 '고이', 보통 역사에 서술하기 어려운 이상한 이야기들을 검토한 '괴설변증', 스승 이익의 논설을 보충하여 작성한 '잡설', 상고사에서 나타나는 지리를 고증하려 노력한 '지리고' 등은 오늘날 역사가들도 다시 음미해 보아야 할 서술로서, 작지만 본격적인 문제를 제기한 좋은 논문들입니다.
  또한 안정복의 문집을 살펴보면, 강화도 고려산(高麗山)에 있는 홍릉(弘陵)을 답사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또한 악부체 서사시로서 고조선의 충신을 읊은 성이가(成已歌), 백제 충신을 읊은 옹산성장가(甕山城將歌), 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신라 장군 문훈(文訓)을 읊은 천성행(泉城行),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 때 고구려의 용사를 읊은 노사행(弩士行), 신라의 일본정벌 관련 설화를 읊은 백마총행(白馬塚行)의 5수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