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철신의 편지'
1.
권철신은 1736년(영조12) 경기도 여주 감호(鑒湖)에서 출생하였습니다. 동생 권일신은 조선천주교회
창립을 주도한 핵심지도자 중의 한사람이었고, 권일신의 제자인 윤유일, 정광수 역시 진산사건 이후 계속하여 조선천주교회를 이끌어 간 핵심
지도자들이었습니다. 또한 사위인 이총억(李寵億)도 천주교를 깊게 공부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진산사건 이후 두문불출하면서 근신하였지만,
1801년 신유교난 때 결국 반대 정파에게 천주교의 괴수로 지목되어 곤장을 맞아 죽을 수밖에 없었다고 보입니다. 이 때문에, 그의 시문집 및
'대학설(大學說)'을 위시한 저술들도 오늘날 거의 전하지 않습니다.
본관은 안동으로서 조선초기 대성리학자인 권근(權近)의 후손입니다. 스스로 호를 녹암(鹿菴)이라 하였고, 자신이 거주하는 곳의 연못을 감호(鑒湖)라 불렀습니다. 그의 묘소는 여주(楊根) 남시면(南始面) 효자산(孝子山)에 있습니다.
2.
녹암 권철신은 1759년경부터 성호 이익을 스승으로 섬겼습니다. 다음 해에는 안정복에게서도 수업하였고,
그로부터 8년 뒤에는 이병휴에게서도 수업하였습니다. 그가 1769년경부터는 양명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다고 하지만, 성호 이익이 말년에 얻은
뛰어난 제자였으므로, 녹암은 기본적으로 주자성리학 공부에서 출발한 실학자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그는 총명하면서도 온화하여,
재주와 덕망을 겸비했다는 평가를 받았고, 스승 이익의 지극한 총애를 받았습니다. 다산은 그가 이기론이나 사단칠정론 같은 학문을 공리공론에 치우친
학문으로 보고, 그보다는 삼강오륜의 실천 같은 현실적 학문에 치중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천척이나 인근 사람은 물론, 먼 지방에서
사는 선비로서 스스로 힘쓰려는 사람들은 모두 그를 표준으로 삼아서 행동하려할 정도가 되었다는 것이죠.
3.
녹암 권철신은 주자성리학의 정통적 해석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고 비판적으로 경전을 해석하는 학문적
태도를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또한 지행합일에 바탕한 실천성을 중요시하는 양명학적 경향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런 때문에 이익과
안정복이 이를 경계하는 편지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그가 깊게 연구한 '대학'과 '중용' 관련 기록들을 보면, 양명학자로서의 경전 해석으로
판단된다고 결론을 내린 연구업적도 있습니다.
이익이 세상을 떠나자, 권철신은 성호의 학통을 집대성하여 이어받은 스승이
되었습니다. 특히 경기도 앵자산에 있는 천진암(天眞菴)과 주어사(走魚寺) 등을 돌아다니며 소장 학자들과 경전을 연구하던 학회 활동이 다산의
기록을 통하여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유로운 토론의 학회활동을 통해서, 제자 중에서 일군의 학자들이 서학 실천운동에까지 나갈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오로지 학자적 양심 만으로 일생을 실천한 권철신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다산은 그로써 성호 이익의 학통이 끊어져 버렸다고 말할 정도로 비통함을 표시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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