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제공(蔡濟恭)은 1720년(숙종 46)에 태어나, 1799년(정조 19)에 사망하였다. 조선후기 영조, 정조 연간 탕평책의 한 축을 받친 남인 계열 대정치가이자 개혁적 관료이다. 시인이기도 해서, 서민 생활에 주목하는 풍속시풍(詩風)이 이가환, 정약용에게 이어졌다.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 또는 번옹(樊翁),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저서로 "번암집(樊巖集)" 59권이 전하는데, 시(詩)가 19권이며 권수(卷首) 2권에는 정조가 내린 어찰(御札) 및 전교(傳敎) 들을 별도로
수록했다. 퇴계 이래 ‘청량(淸凉)’으로 상징되는 남인 계열의 조선중화주의에 입각한 연행시집 "함인록(含忍錄)"도 남겼다.
그는 충청도 홍주에서 지중추부사 응일(膺一)과 어머니 연안 이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청년기부터는 지방관으로 나아간 때를
제외하면 대부분 서울에서 생활했다. 그는 1735년(15세)에 향시(鄕試)에 급제했고, 8년 뒤 1743년 문과 정시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 권지부정자로 관직을 시작했다. 1748년 사관(史官)을 뽑는 한림회권(翰林會圈) 때 탕평을 표방한 영조의 특명으로 선발되었다. 이는
영조의 왕위 정통성을 부정하는 반란인 1728년 무신난(戊申亂) 평정에 공을 세운 그의 스승 오광운(吳光運)을 잇게 하려한
때문이었다.
1753년에는 충청도 암행어사로서 균역법 폐단의 시정과 변방 대책을 올렸다. 1755년 나주괘서사건(乙亥逆獄) 때는
문사랑(問事郞)을 역임했고, 1758년 "열성지장(列聖誌狀)" 편찬 공로로 도승지가 되었다. 당시 채제공은 스승 오광운을 이어서 청남(南人
淸論)정파를 이끌었는데, 소론 강경정파[峻論] 지도자 이종성(李宗城)과 연대해 사도세자와 영조의 악화된 부자관계를 회복시키려 노력했다. 특히 그
해에 세자를 폐위시키겠다는 비망기(備忘記)가 내려졌을 때는 도승지로서 죽음을 무릅쓰고 막아 이를 철회시켰다. 이 때문에 후일 영조는 왕세손인
정조에게 채제공을 지적해 “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말했다 한다. 이후 대사간, 대사헌, 경기감사를 역임하던 중
1762년 모친상으로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그 해 윤5월에 결국 임오화변(壬午禍變: 사도세자의 죽음)이 일어났다.
이후
개성유수, 홍문관제학, 함경도관찰사, 한성판윤을 거쳐, 병조, 예조, 호조판서를 역임했고, 1772년에는 왕세손 보호를 담당하는
세손우빈객(世孫右賓客)을 맡았다. 당시 채제공은 홍봉한(洪鳳漢)의 외척당인 북당과, 김귀주(金龜柱)의 외척당인 남당 양쪽에서 모두 기피 인물로
지목됐을 정도로 이들과 대립 관계에 있었다.
정조가 왕세손으로 대리청정을 한 뒤에는 호조판서, 좌참찬으로 활약했고, 1776년 3월 영조가 승하하자 국장도감제조로써
행장(行狀), 시장(諡狀) 및 어제(御製), 어필(御筆) 편찬 작업에 참여했다.
정조 즉위 후, 영조 말년의 정치를 좌지우지한 노,소론
외척당과 김상로(金尙魯), 홍계희(洪啓禧) 계열 등 사도세자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자들을 처단할 때, 채제공은 병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로서 옥사를
처결했다. 또 1777년 가을에 홍계희 계열의 자객이 궁궐을 침범하는 상황이 벌어지자, 궁궐을 수비하는 수궁대장(守宮大將)을 맡기도
했다.
채제공은 정조 즉위 직후부터 착수된 개혁 정책을 충실히 보좌했다. 정조의 특명으로 시노비(寺奴婢)의 폐단을 교정하는
조목을 마련했는데, 국가가 노비를 찾아주는 노비추쇄관(奴婢推刷官) 제도를 없애고 시노비의 수를 점진적으로 감소시킴으로써, 결국 1801년(순조
1)의 시노비 해방을 가능하게 했다. 규장각이 설치되자, 노론 지도자 김종수(金鍾秀)와 함께 제학으로써 규장각 직제를 완성했다. 또 당시 청에
보낸 외교 문서 문제가 발생하자, 1778년 3월에는 사은겸진주정사(謝恩兼陳奏正使)로 청나라에 가서 이를 해결했다. 그 전후 강화유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1780년(정조 4) 홍국영(洪國榮)이 축출되고, 소론계 서명선(徐命善)을 수상으로 하는 정권이 들어서자, 채제공은 3대
죄안이라는 명목으로 집중 공격을 받고, 이후 8년 가까이 정계에서 물러나 서울 근교 명덕산에 은거했다. 홍국영과 특히 가까웠다는 것,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복수를 해야 한다는 격한 주장을 하다 역적으로 처단된 인물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 그들과 같은 흉언을 실제로 말했다는 것 등이
그의 3대 죄안이었다. 이 3대 죄안은 1786년 9월에 정조가 직접 근거가 없거나 부당함을 지적해 논의 자체를 중단시켰다. 그러나 이를
기점으로, 노론계와도 친밀했던 홍명보(洪明輔)를 잇는 홍수보(洪秀輔) 계열, 친우였던 목만중(睦萬中) 계열, 가까운 친척인 채홍리(蔡弘履)
계열이 청남(남인 청론) 정파에서 갈라져 나갔다.
1788년 그는 국왕의 친필로 우의정에 특채되었다. 이때 황극(皇極)을 세움으로써 영조이래 군주 주도의 탕평책을 계속 추진할
것, 당론(黨論)을 없앨 것, 의리를 밝힐 것, 백성의 어려움을 근심할 것, 탐관오리를 징벌할 것, 국가 기강을 바로잡을 것 등 6조를 진언했고
이를 실천하려 노력했다. 특히 그는 당론의 폐쇄성에 대헤서 반성하고 정통 학문을 의미하는 사문(斯文)을 확대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의 정치적
후계자 중 서양학을 학문의 근본으로 삼고 천주교 신앙까지 수용하는 서학파가 나타날 수 있었던 연유이기도 하다.
1790년에는
좌의정이자 행정부 수상이 되었고, 그 해 7월 우의정 김종수가 모친상으로 물러나자, 이후 3년 동안 독상(獨相)으로 정사를 전담했다. 이 시기에
탕평책을 계속 추진하기 위한 장치로 이조전랑이 가졌던 동료추천제[自代制] 및 당하관 독점 추천권[通淸權]을 다시 없애기도 했다. 또한 도성
안에서 물화를 독점 판매하려는 시전(市廛)의 물가 조작이 계속되자, 신해통공(辛亥通共) 정책을 실시해 육의전(六矣廛)을 뺀 모든 시전의 독점
판매권을 없애기도 했다. 농민들의 생산물을 취급하는 일반 상인의 자유로운 상거래를 보장한 획기적인 조치였다.
동시에 이 기간에 반대정파들의
역공으로, 천주교 신봉자가 조상의 신주를 불태운 진산사건(珍山事件)이 심각한 정치 문제가 되었다.
1793년 영의정에 임명되었을 때는 전 해 윤4월에 있었던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에서와 같이, 죄인으로 죽은 사도세자를
신원(伸寃)하기 위한 단호한 조치[討逆]를 취해서 새로운 의리[壬午義理]를 세울 것을 주장했다. 이로 인한 심각한 대치 국면은 사도세자에 대한
처분을 후회하는 내용을 담은 영조 친필의 비밀 문서인 ‘금등’(金縢)이 공개됨으로써 해결되었다.
그러나 이는 결국 노론
당파에게 사도세자 죽음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뜻이어서, 이후 벽파(僻派)로 불리는 노론 강경파의 집요한 공격이 야기되었다. 특히 그의 측근
세력 중에 서학자 및 천주교 신봉자가 많다는 사실 때문에, ‘척사(斥邪)’를 기치로 한 거센 공격을 받았다.
같은 해
12월에는 화성(華城: 수원성) 축성 사업을 총리하여 1795년 2월 완공하였다. 1798년 전후부터는 벽파를 중심으로 한 반대정파가 다시
서학에 대한 공격을 강화하자, 그 해 6월 나이가 많음을 이유로 사직했다. 그는 정조 연간에 "경종개수실록(景宗改修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국조보감(國朝寶鑑)" 편찬 작업도 참여했다.
1799년 1월 그가 죽자, 정조는 그를 세상에 좀처럼
나기 어려운 뛰어난 인물[間氣人物]이라고 칭송했고, “나와 이 대신 사이에는 다른 사람은 알지 못하지만 홀로 아는 깊은 일치함[契合]이
있었다”며 한탄하기도 했다. 1800년 5월에 있었던 정조 임금의 오회연교(五晦筵敎)에 의하면, 채제공, 김종수, 윤시동 3인이 바로 탕평
추진을 위해 특별히 선택한 인재들이었다. 다음에 선택될 후계자들로는 이가환, 정약용, 박지원, 심환지들이 거론되기도 했다. 채제공의 장례일에는
정조의 제문이 내려졌고, 경상도 지역 10여 개 서원에서 적극 참여해 사림장(士林葬)으로 거행되었다. 묘는 경기도 용인 북동쪽에
있다.
체재공의 친우로는 동문인 정범조, 이헌경(李獻慶)과 신광수(申光洙), 정재원(丁載遠), 안정복(安鼎福) 그리고 이승훈의
부친 이동직(李東稷) 등이 있고, 정치적 후계자로는 기호 지방의 이가환(李家煥), 최헌중(崔獻重), 정약용, 이승훈(李承薰), 한치응(韓致應),
영남 지방의 유태좌(柳台佐), 유치명(柳致明) 등이 있었다. 정약용이 기록한 죽란시사(竹欄詩社)와 연결되는 관료들이다.
1801년에는 벽파 정권이 그의 후계자 가운데 신유년에 국사범으로 처단된 서학 신봉자가 많다는 점, 청과 서양의 힘을
빌려 조선을 압박하려 기도한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 사건을 이유로 그의 관작(官爵)을 박탈하였다. 그러나 1823년에 올려진 영남만인소가
받아들여져 다시 관작이 회복되었고, 순조 연간 유태좌가 충청남도 청양(靑陽)에 채제공의 영각(影閣)을 세웠다. 1965년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에 홍가신(洪可臣), 허목(許穆)과 채제공을 함께 모시는 도강영당(道江影堂)이 건립되었다.
그는 영조초년 청남 계열 정파의 지도자 오광운이 닦아놓은 정치적 기반과 노선을 이어받았다. 정치 노선의 특징은 학문은
허목을 종주(宗主)로 하고, 사림정치의 원칙에 투철해야 한다는 청류(淸流) 또는 청론(淸論)의 기치 아래, 척리(戚里)와의 연결을 배제하고,
준엄한 의리를 우선하는 강경정파[峻論]가 주도하는 탕평을 추진할 것을 주장하는 등이다. 청남 정파는 그의 지도로 인하여, 정조 연간에는 탕평의
일각을 받치는 정파로 성장했다. 그는 붕당이란 바로 부귀를 독점하려는 권신(權臣)이 이익을 제대로 나누지 않아서 발생했다고 보았는데,
윤선도(尹善道)에서 이익(李瀷)으로 이어지는 남인 계열의 오랜 붕당관이다.
그의 국가체제론은 실제로 효과있는 사업[實事求是]에
힘쓴 서한(西漢, 前漢)의 통치 체제를 깊게 연구하여, 봉건제의 정신을 살리는 절충형 군현제를 조선 현실에 적용해보려는 노력에 있었다. 같은
계열의 대학자 성호 이익이 학문적으로 잘 체계화해 놓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전통적인 농업우선정책을 지켰지만, 상업의
활성화가 국가 재정을 비롯한 서민 경제에 필요하다는 점도 인식했다. 그가 인삼 재배의 권장과 은(銀)과 삼(蔘)을 통용할 것을 주장한 것은 국내
물자의 유통과 공무역의 활성화를 가져오기도 했다. 그가 수상으로 1791년 1월부터 적극적으로 추진한 신해통공(辛亥通共) 정책은 육의전을 제외한
일반 시전이 전매하던 상품을 소상인이나 소상품 생산자도 자유롭게 판매할 수 있도록 한 조치였다. 정약용은 통공정책 실시 이후 비로소 도성인들이
설 같은 대목에 물화를 쉽게 구할 수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이 정책들은 민산(民産)을 풍족하게 하고 상업을 활성화함으로써 시가를 번성하게 한다는
민생 정책이었다. 결국 당시 일반 농민들의 잉여 생산물의 증대로 개방적인 유통경제구조가 확대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평가된다.
그의 인척이나 정치적 후계자들이 많이 신봉했던 천주학 때문에, 사후 삭탈관작을 당하기도 했지만, 그는 서학을 이단사상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특히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언급하면서 서학에 대해서 두 가지 비판을 했다. 첫째, ‘무부무군’(無父無君)이어서 인간의 일상 윤리에 어긋난다는
것이었다. 둘째, 천당설이나 기적설은 개인의 사적 이익 추구를 특징으로 하므로, 신이(神異)를 강조하는 등 이치에 맞지 않는 주장으로 이어져서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우려가 있다는 것이었다. 결국 불교 중의 별파라고 결론지었다. 진산사건 이후에도 채제공은 “서양학은 실로 불교 서적과
대동소이하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사학(邪學) 배척을 내세워서 서학 신봉자에게 반역죄를 적용하자는 주장을 당론(黨論)이며 이치에 맞지 않는
요구라고 배격해버렸다. 제사 폐지 문제도 결국은 천당지옥설 때문이라고 파악했다.
그런데 그는 불교, 도교, 양명학 같은 이단
사상도 가정이나 국가를 다스리는 데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사상으로 잘 쓰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서학에도 ‘상제가 하늘과 땅
어디에서나 늘 좌우에서 인간을 굽어 살펴본다는 설’(上帝監臨陟降左右之說)은 좋다는 견해도 피력하였다. 백성의 교화에 유익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데
도움이 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 해석된다.
정조는 그에게 서학 문제를 위임하였고, 그는 “그 사람은 사람 되게 하고 그 책은
태워버린다”는 교화 우선 원칙을 적용하려 했다. 이 때문에 정조연간의 천주교 정책은 이단이라도 통치에 잘 쓰기만 하면 도움이 되므로 교화 우선
원칙을 사용함이 좋다는 포용론이 주로 시행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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