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인물과 역사

성호 이익의 조선사회 개혁론

써니2022 2006. 7. 2. 18:52

 

 

'성호 이익 친필'

 

  1.

  성호 이익(星湖 李瀷)은 반계 유형원의 사회개혁 방안을 이어받아 대성한 남인 계열 실학자이다. 그는 유형원을 “몸은 일개 필부였으나, 뜻은 만물을 구원하는데 두었다”고 높게 평가하였다. 이익의 당숙부 이원진(李元鎭)은 유형원의 외숙부로서, 유형원을 가르치기도 한 스승이어서, 이익과 유형원은 연척관계이기도 하다.
  성호 이익은 서인과 남인이 서로를 죽이는 격렬한 당쟁의 불행 속에서 태어났다. 본인 자신이 경신환국(1680년)으로 정계에서 축출된 아버지의 유배지인 평안도 벽동에서 태어났을 뿐 아니라, 갑술환국 이후에는 둘째 형인 이잠(李潛)이 노론 당파에 대항하여 경종을 모해하려는 자들을 처단해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는 비극을 겪어야 했다. 이후, 그는 벼슬길을 단념하고 안산 첨성리 선영으로 내려가서, 일생을 재야에서 지냈다.
  곧 성호 자신은 결코 정치에 뜻을 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가문은 대대로 유명한 남인 정치가 집안이었다. 게다가 1728년 영조를 정통성 없는 임금으로 지목했기 때문에 일어난 무신란 때 많은 남인 가문이 대부분 이 변란에 연루되어 처벌받았지만, 성호 집안만은 아무도 이 변란 참여자로서 처벌받은 사람이 없었다. 이런 연유로 해서 그 당시와 후일 영조, 정조년간 청남 정권의 핵심을 이루는 지도급 인물들에게 학문적으로 큰 영향을 준 산림 학자로서, 오늘날 성호학파라고 부르는 일군의 학자들을 키워냈다. 그의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학자들이 안정복, 신후담, 윤동규, 권철신, 정치가들이 바로 채제공, 이가환, 정약용 등이다. 아들 이맹휴는 '춘관지'를 남겼고, 종자  이용휴는 역학(易學)과 산학(算學), 종손 이중환과 이가환은 각각 지리학과 기하학에서 일가를 이루었다. 그래서 다산 정약용은 “우리들이 능히 천지가 크고 일월이 밝은 것을 알게 된 것은 모두 이 선생의 힘이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2.
  이익의 본관은 여주이다. 1682년 출생하여 1764년 83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그의 집안은 증조 이상의(李尙毅) 때부터 서울 정동에서 거주하였지만, 성호 자신은 둘째 형이 역적으로 몰려 죽은 이후, 한평생을 거의 경기도 안산 첨성리에서 거주하였다. 둘째 형의 묘소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의 묘소 역시 같은 곳에 있다. 그의 호인 성호(星湖)는 집 근처의 호수 이름을 그대로 따다 붙인 것이었다. 아버지는 남인으로서 오늘날 내무부장관 급에 해당하는 이조판서를 지낸 이하진이다.
  성호 이익은 만학이었다. 10세가 되어서도 글을 배우지 못했다. 그 이유는 어릴 때 건강이 아주 좋지 않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청년기부터는 전혀 달라졌다. 그는 체질이 건장하고 풍채가 고결하며 눈에 광채가 있고 수염이 길게 드리운 모습이었다고 한다. 학문 자세가 근면하였고 엄밀한 규율에 입각하기를 좋아하였으며,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을 특별하게 싫어하였다고 한다. 사색하다가 얻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필기해 두었다가 저작에 포함시켰다 한다. 특히 절친한 친우 뿐 아니라 제자에게까지도 겸손한 어조로서 토론하고 문답하기를 즐겼으므로, 첫인상과도 그대로 일치하는 수양과 인격이 높은 학자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익은 스스로를 농부로서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자처하였다. “농부는 철로써 경작하고 공부하는 선비는 붓으로써 경작하는데, 만약 시절이 원활하지 못하여 선비가 때를 얻지 못하면 반드시 농사에 의지하여 생활을 영위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는 자신을 힘으로 농사짓는 농부가 아니라 마음으로 농사짓는 농부라고 부르기도 했다. 주변 사물을 세심하게 관찰하면서 많은 영농지식을 쌓아나갔던 것이다.
  동시에 공부하는 선비로서 자신을 평가할 때는, 천하의 일을 넓게 알지 못하는 시골사람이라고 불렀다. 이 때문에 세상사에 뒤떨어지지 않도록 열심히 공부하였고, 중국을 왕래하는 역관들과 친하면서 새로운 지식이 담긴 서적들을 구하려고 열심히 노력하였다. 그 결과, 이익은 개인문집인 '성호선생전집'과 '사설(僿說)' '곽우록(藿憂錄)', 4서3경을 포함하는 유교 경전에 대한 질서(疾書) 등 1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천문, 지리, 경제, 군사, 문학, 역사, 풍속 등 넓은 범위에 걸치는 백과사전적 저술이었고, 당시로서는 서양의 자연과학과 천주교 관련 서적들까지 섭렵하는 등, 세계적인 안목을 갖춘 훌륭한 내용들이었다.
  이렇게 이룩된 그의 학문이었지만, 남인 몰락 이후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하였다가, 대원군 집권 때 같은 당파의 우의정 유후조의 건의로 이조판서가 증직되면서부터 비로소 널리 주목을 받으면서 재조명되기 시작하였다.

 

  3.
  성호 이익은 일찍이 파당적 학문 억압과 사상의 자유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창조적 사상과 비판적인 학문 자세를 옹호하였다. 이와 관련해서는 특히 주자에 대한 비판이 유명하다. 그는 “지금 학자들은 주자의 주해에 대하여 한글자라도 의심하면 망발이라고 하고, 참고 대조만 하여도 죄악이라고 한다. 이러면 우리나라 학문은 결코 고루하고 무식한 것을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이상적인 정치의 기본이 되는 삼대의 봉건제론, 정전제론에 대한 주자의 오류를 지적하였고, 주자가례에 대한 비판까지 보여지는 점이 특징적이다. '맹자질서(孟子疾書)'에서 그는 '주례'나 '맹자'를 설명하는 문장에도 착오가 있어서 사방 오백리의 땅과 사방 백리의 땅 다섯을 같다고 보는 등, 정전(井田)을 설명하는데도 착오가 있고, 봉건(封建)을 논하는데도 착오가 있었다는 점을 명확하게 지적하였다. 곧 이익의 봉건제론은 처음부터 주자의 입장을 비판하는 데서 출발했다. 오히려 주자와는 학통이 다른 호상학파(湖湘學派)에 속했던 장식(張栻)의 견해를 긍정하였다. 결국 이익은 주자 봉건제론의 비판을 통하여, 원론적인 봉건제보다는 군현의 장점을 절충한 서한의 '잡건(雜建)'에 입각한 국가체제를 긍정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모든 토지는 원래 공적인 것, 곧 국가의 소유라는 정전제적 논의를 바탕으로 하여, 국가가 개인의 토지소유를 일정한 수준에서 제한해야 한다는 토지소유 제한론(限田論)을 구상하기도 했다.
  이는 이익의 학문 경향이 명말청초에 육경고문(六經古文)과 역사학을 함께 존중했던 경세학파(經世學派) 학문과 깊게 통하는 측면과 일정한 관련성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성호의 문집을 살펴보면, 그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학문을 넓게 섭렵하되, 성리학자의 입장에서 종합 절충하고 있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사회개혁을 위한 총론으로 저술한 '곽우록'이 황종희(黃宗羲)의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고 보는 학자도 있다. 서론의 서술에 나타나는 입장 표명, 기본 논지의 틀과 서술 분야, 연구 방향에서 많은 유사성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후 이익의 학문 자세는 유교 이념을 원칙으로 하고 서양 기술을 이용할 수 있다고 보는 중체서용론(中體西用論) 입장까지 나아갔다. 이 경향은 영조 중반 이후 '명사(明史)'가 보급되고 명말청초 경세학풍이 점차 널리 알려지면서, 성호 학통에서 특히 권철신(權哲身) 문하의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4. 당시 사회를 좀먹는 6가지 현상
  성호 이익의 학문이 사회 개혁이 필요하다는 방향으로 전개된 것은, 당시 사회를 좀먹는 6가지 현상을 타파해야 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지적은 경제적 생산 문제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으므로, 다시 말하면 당시 사회의 창조적 생산을 가로막는 6가지 요인이라고 해석된다.
  우선 노비제도와 벌열제도였다. 이런 선비와 평민 사이를 가로지르는 신분적 차별성을 타파해야 모든 사람이 즐거이 생산 활동에 임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은 과거제도 그리고 ‘기교’ 문제였다. 이러한 가벼운 인심과 풍속을 없애야 세상을 진중하고 생산적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불교의 중과 비구니, 그리고 놀고 먹는 자들을 지적하였다. 곧 힘들여 생산하지 않으면서도 먹고 살 수 있는 사회의 제도적 장치를 없앰으로써 사회를 생산적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근검, 절약의 정신을 제대로 실천함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후손들에게 자신이 죽은 뒤에 제사를 지낼 때, 시간과 돈이 많이 드는 술 대신 간편하게 만들 수 있는 감주를 쓰라고 유언할 정도였다.

 

  5. 정치개혁론
  성호 이익은 원래 주자성리학자였다. 그래서 그의 인성론은 인간은 본래 선하다는 맹자의 성선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정치개혁론은 중국의 삼대 시절의 이상적인 정치라는 왕도정치, 민본정치를 기본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정치의 기본은 민생의 안정을 통한 백성의 보호(保民)였다. 그런데 당시 상황으로 본다면,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먼저 잘못되어 있는 현행의 법과 제도를 크게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 성호의 주장이었다.
  “정치가 쇠퇴한 후에는 변통의 논의가 일어나는 것은 부득이하다. 정치를 논함에는 반드시 마땅히 먼저 그 폐단을 밝혀서 개혁하지 않으면 안되고, 법을 고수만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당시의 가장 큰 폐단은 붕당간의 쟁투였다. 남인의 입장에서 보면 특히 노론당의 전권이었다. 이래서 숙종말 영조초부터는 붕당을 타파해야 한다는 탕평의 정치가 거론되고 있었다. 성호는 기본적으로 붕당을 타파해야 한다는 사실에 동의하였다.
  “붕당은 싸움에서 일어나고 싸움은 이해관계에서 일어난다”는 것은 고산 윤선도 이래 남인계 지식인들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성호 역시 “이해관계가 절실하면 그 당의 결합이 깊어지고, 이해관계가 오래 계속되면 그 당의 결합이 견고하게 되는 것은 필연의 추세이다”라 하여 이에 동의를 표하였다.
  그런데 이해관계의 으뜸은 부귀가 보장되는 관작이므로, “벼슬에 나아가기를 쉽게 여기는 자만을 힘껏 제거한다면 붕당은 반드시 저절로 그칠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말이 바로 정치현실을 바꾸기 위한 성호 이익의 원론적인 사고방식이었다.
  하지만 성호는 원론적인 제시에 그치지 않고, 실제적인 방안들을 제시하였다.
  우선 선비들은 농사에 힘써서 생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선비와 농부는 같다는 정신을 실천하는 사회 기풍을 진작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에는 당시 지나치게 빈번한 과거시험의 횟수를 줄여서, 관리자격자의 수효를 줄여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적으로는 과거제도를 합리적으로 고치고, 관리의 치적을 엄정하게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제도 합리화 방안은 다음과 같다. 우선 3년 단위의 시험을 5년 단위로 바꾸고, 문장 능력보다는 고전 이해 능력을 중심으로 선발하자는 것이었다. 더 중요한 주장은 천인 신분에게도 과거를 개방하자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응시자의 시험지에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성명만을 기록하게 하고 관직 등 여타 조항은 기록하지 않게 함으로써, 문벌 중심으로 선발되지 않고 재주 중심으로 선발되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다음으로는 과거시험 뿐 아니라 향촌에서 널리 인정받고 있는 인재를 뽑아 쓰되, 추천자에 대한 연좌제를 도입하는 등 천거제도를 적극 병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6. 통치체제 개편론
  우선 진정한 선비가 통치자인 군주의 권한을 제어할 수 있는 통치 방식, 곧 이상적인 군신공치론(君臣共治論)적 원칙에 입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비변사라는 문신과 무신의 합의에 의한 최고 정책결정기구를 쓰지 말고, 덕이 있는 재상에게 권력을 집중시키는 방식을 써야 한다고 하였다.
  다음은 군주와 관리를 감찰하고 간쟁하는 언론기관을 보다 활성화시키는 방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조선왕조의 언론기관인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관료의 녹봉을 올려주고 오랫동안 근무할 수 있는 제도적 여건을 조성해 나가야 한다고 하였다. 언론을 활성화하기 위해서 하나 덧붙인 것은, 언론의 권한을 삼사에 한정시키지 말고 계속 확대해 나가자는 것, 그리고 군주의 비서실인 승정원에서 함부로 백성들의 여론을 재단하지 않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를 만들자는 것이었다.
  세 번째로는 인사행정을 획기적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사권을 총괄하여 행사하는 관서인 총장사(總章司)를 새로 설치하자고 하였다.
  네 번째로는 지방행정기관의 기능을 대폭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도지사격인 관찰사의 임기를 1년에서 5년으로 늘림으로써 일반 지방 수령과 동일하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보다 전문적인 행정관료로써 책임지고 사무를 관할할 수 있도록 하자는 판단이었다. 다만 이 경우, 지방 재정을 책임지는 판관의 감시 권한을 강화함으로써 확실한 견제장치를 두어야 한다고 보았다. 다음으로 지방 수령의 평가는 완전히 개인 능력 위주로 해야 한다고 하였다. 당시 양반벌열의 폐해를 막아야 한다는 판단이었다. 다음으로 지방의 자치적인 관리에 속하는 향청의 좌수나 별감도 일반 관직으로 대우하는 한편, 유능한 자는 중앙 관직으로 나갈 수 있는 통로를 열어놓아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7. 역사에 대한 생각
  “오늘날의 중국은 대지 가운데 한 조각 땅에 지나지 않으며, 지구상에는 중화 이외에 서양이라는 또 하나의 세계가 있다.” “중국의 중화 문화를 귀하게 여기고 우리의 동이 문화를 천하게 여기는 것은 옳지 않다.” “정통론은 언제나 궁한 구석이 있다.”
  성호 이익 하면 언제나 거론되는 유명한 말이다. 이는 당시 지식인 사회를 지배하고 있던 보편지식의 계보를 존중하는 이데올로기적 학문관, 화이론적 세계관이라는 거대관념(메타이념)에 대한 과감한 타파였다. 조선만이 중화의 계승자라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인식에 대한 공격이자, 상대주의적 세계관으로서 우리의 주체성을 인식하고, 이로써 우리들이 스스로 살아왔던 창조적 체험을 긍정하자는 의미가 된다.
  성호 이익 하면 또 거론되는 유명한 구절이 있다. “사람들은 매양 결과로써 성공과 실패를 논하기 때문에 실수가 많다.” “천하의 일은 시세가 제일 중요하고, 행, 불행이 그 다음이며, 시비는 제일 마지막이다.” 라는 말들이다.
  이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선악과 시비 판정의 자의성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다. 개인적인 도덕성이나 재주보다는 시대적 추세로써 당시 세상의 모습를 파악해야 한다는 성호의 역사관은, 후일 다산의 ‘이용후생’을 기준으로 보는 역사관으로 이어졌다. 명분이나 도덕만으로 그 시대적 추세를 파악하기보다는, 현실을 두루두루 종합해서 보는, 보다 총체적인 역사인식으로 발전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