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표-인물과 역사

연암 박지원의 조선사회 개혁론

써니2022 2006. 4. 29. 19:02

 

 

  연암의 사회, 경제 개혁 방안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중국의 “볼만한 것은 깨어진 기왓장과 똥거름에 있다고 대답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자신이 본 중국의 화려함이 만리장성이나 궁궐 규모 같은 데에 있지 않은 이유를, 연암은 “용에게는 여의주가 귀하듯이 쇠똥구리에게는 쇠똥이 귀하다”는 비유로 설명하였다. 곧 자신을 한 사람의 농민으로 사는 사대부라고 파악한 것이다.
  이런 자세에서 나온 연암의 가장 체계적인 저술은 63세 때 쓴 <<과농소초(課農小抄)>>이다. 그가 42세때 연암 협곡에서 어렵게 생활한 경험으로부터 시작하여 오랫동안 준비해 온 그의 농업에 대한 저술에 자세한 설명(按說)을 붙이고, 사회개혁론인 한민명전의(限民名田議)로서 결론을 맺은 책이다. 연암은 이 책에서 중국 농서를 총정리한 서광계(徐光啓)의 <<농정전서(農政全書)>>를 위시한 당시 중국의 선진 농학을 수용하여 우리 농사법의 결함을 보완하려고 하였다. 수리 기술과 지력을 잘 이용할 수 있는 토지경작 방식, 지력을 최대한 이용할 수 있는 시비법, 노동력 절약을 위한 농기구 개량 같은 농업 기술 변화를 통하여 생산력을 증대시킨다는 것이 중심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농업기술의 변화를 촉진시키자는 논의는 이미 주자에게도 보여진다. 연암의 개성은 농민 입장에서 토지소유 관계의 변혁을 주장한 데 있었다. 곧 당시 농업사회에서 커다란 사회문제가 되었던 대토지겸병을 막고 생산력을 증대시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그 자신도 농사를 지으려 했지만 토지가 없어서 못한 경험이 있었다. 연암은 한 사람의 농민 지식인이자 토지를 상실한 영세농의 입장에서, 토지를 재분배하기 위한 토지제도 개혁론을 제기하려 했던 것이다.
  연암은 가장 좋은 개혁은 토지를 몰수하여 고루 분배하는 것이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므로 차선책으로 한전법(限田法)이 바람직하다고 하였다. 한전법은 국가가 정하는 한도를 넘은 토지 소유자의 토지 매입을 금지하고, 한도를 넘어 소유한 토지는 상속과 매매를 통하여 수십년이 지난 후에 자연적으로 균등하게 분배되도록 유도하는 일종의 토지소유 상한제이다. 남인 계열의 선배 실학자인 성호 이익이 구상했던 방식과 동일하다. 이는 이미 정조 2년에 국왕이 반포한 사회개혁을 위한 교서[大誥}에서 '사람이 각자 자기의 전답을 가질 수 없으면 힘껏 일하려 해도 어찌 가능하겠는가'라고 할 정도로 당시 널리 인정받고 있던 사회문제이기도 하다.

 

 

  연암의 새로운 인간에 대한 생각


  연암이 성호와 달랐던 것은 사회의 변화는 옛 인간을 밀어낼 수 있는 새로운 인간이 나타남으로써 가능해지고 더욱 촉진된다는 사실을 보다 분명하게 제시했던 데 있다. 문학가이기도 했던 연암은 “해와 달이 아무리 오래 되었다고 해도 그 빛은 날마다 새로운 것이다”라고 하여 만물은 시간에 따라 항상 변하므로, 특히 지금의 시간과 위치에서 새로운 것을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곧 연암은 오랫동안 자기 땅에서 살아온 인간에게서 나타나는 새로운 빛, 곧 인간의 새로운 변화에 특히 주목하였다.
  당시 연암이 파악하고 있었던 변하지 않는 옛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과 아무 관계가 없는 문벌만을 자랑하는 양반이었다. 곧 <호질(虎叱)>에 나오는 북곽선생처럼 불가능한 존주대의론을 고수하는 고루한 유학자, 위선으로 가득찬 인간들이었다. 호랑이는 이런 옛 인간들에게 “하늘에게는 호랑이와 인간이 모두 같은 사물이다”라고 꾸짖었다. 동물의 본성과 인간의 본성이 같으니, 인간과 인간의 본성이 서로 같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새로운 인간은 양반 출신이든, 역관이나 평민 출신이든 어디서도 나타난다. 이들은 <옥갑야화(玉匣夜話)>에 나오는 역관 출신 부자인 변승업(卞承業)의 조부, 책만 읽던 양반 출신 허생, 조선의 간교한 역관을 도와준 중국인 상인과 같이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진 인간들이다.
  연암의 메씨지는 간단하다. 허생처럼 1만량을 가지고 10만량을 만드는 일은 새로운 인간, 곧 상공업의 변화와 유통경제 확대 현상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능력을 갖춘 기업가적 인간만이 할 수 있다. 옷차림에 관계없이 허생의 규모있는[不待物而自足者] 태도를 한눈에 알아보고 보고 선뜻 1만량을 빌려준 변가처럼 사람의 그릇을 잘 보고 절대적으로 믿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중국인 상인처럼 가끔 사람을 잘못 보아서 자신을 길에서 죽은 것으로 꾸미는 간교한 역관에게처럼 투자한 1만량을 모두 잃었다 해도, 후회하거나 분노하기 보다 뒷 수습을 위해 장례 비용 1백량이라는 작은 투자의 필요성을 알고 이를 아끼지 않는 사람이 곧 그 간교한 역관이 결국 진짜 길에서 죽을 것을 예견하듯이 행동한 것처럼, 미래를 예견하고 만들어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연암은 이러한 새로운 인간 모두에 대해서 따뜻한 애정을 표현하였다. 특히 <허생전>에서는 이런 능력을 가진 사람은 전통적으로 유명한 변산의 도적떼, 곧 농민 봉기군 문제도 해외의 신국가 건설 운동 같은 방법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농민적 유토피아 사상을 글로 옮겨놓기도 했다. 사실 <<열하일기>>는 <<홍길동전>>과 같은 이 부분 때문에도 물의를 일으켰을 것이다. 그러나 이 서술은 사실상 사회개혁론을 피해가는 서술이라는 점에서 도피적이고 냉소적이기까지 하다. 다만 문학적으로는 오히려 다양한 대리만족을 추구하는 독자층의 요구를 적극 표현해 준 속학(俗學)이라는 요소에 해당된다. 그래서 연암의 이런 행동은 일찌기 ‘격렬한 글전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이다.
  연암은 새로운 기업가적 인간형을 찾아냈으면서도, 봉건적 국가와 일반 농민의 타협을 염원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곧 사회 현상을 과학적으로 체계화하는 실천의 측면을 강조하기 보다, 사회 문제 각각의 해결 방안마다 실용이라는 측면을 강조하고 있고, 작품에 따라 일관적이지도 못한 모순들이 나타난다. 이는 곧 연암 자신이 유명한 서울 출신 양반문벌[京華閥閱]이라는 자신의 입지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연암 개혁 방안의 진보성과 제한성

 

  청나라와 비교할 때 낙후된 조선 현실을, ‘이용후생’ 기술을 도입하여 개혁하려한 선각자라는 해석만으로는 연암 박지원을 잘못 이해한 것이다. 이는 북학론 또는 이용후생론을 실용주의적 입장에서만 이해한 경우이다. 연암의 제자 박제가가 이런 이용후생 일변도의 경향이 특히 강하게 나타나서, 지나치게 가볍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곧 결국 또 하나의 조건없는 큰 나라 추종 경향으로 비난받을 소지가 충분하다. '북학'이라는 용어 그대로 선진 청나라 문물을 배우자는 캠페인 수준 정도는 훌쩍 넘어설 수 있는 변용 능력이 있을 때만이, 세계화론이든지 이용후생론이든지 간에 진정으로 우리 역사 속으로 들어오게 된다. 곧 당시 조선중화주의라는 이념 속에 녹아 내려오던 조선 사회의 고유성과도 결합하여 정착하는 면모가 있을 때만이 이용후생론적 입장이 그 의미를 갖는다. 이는 오늘날 세계화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연암은 바로 이런 고유한 뿌리를 존중한 학문적 지도자였다. 그는 육경고학을 학문의 바탕으로 삼았고, 명분있는 가르침을 바탕으로 초연히 자신의 길을 홀로 가겠다는 입장에서 출발하여, 당시 사회에 뿌리를 가진 이른바 속학의 지도자로 인정받았던 것이다. 연암의 이런 학문적 바탕은 그의 손자 박규수(朴珪壽)에 이르러서 '동도서기(東道西器)'의 학파를 형성했고, 조선적 사회개혁론을 이끈 조선적 경세학풍으로 되살아날 수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역시 다산과도 마찬가지로, 명말청초 한송절충론 입장에서 출발하여 박학에 이른 고염무(顧炎武)의 학문을 높게 평가한 데 있다.
  정치적으로 볼 때 육경고학을 바탕으로 하는 노론 청명당 정파는 성리학에 입각한 본질주의적 정치의식을 지켰다. 정치 관료로서 청명당 정파 범주에서 활동했던 연암 역시 이에서 떠났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체계적인 개혁안에서는 우리 전통사회의 고유성을 바탕으로 발전해 온 농업사회의 모순구조를 유통경제를 통해서 보다 실용주의적으로 전환시키려는 입장을 택하였다. 곧 개혁 지향의 군주권을 강화하는 속에서 점진적인 변화를 도모하는 수준에 머물렀던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연암이 근대사회를 미리 알고 있었던 선각자라고 할 수는 없다. 요즈음 쓰는 역사 용어로는 '경화벌열'이지만, 그의 계층성은 결국 서울에 뿌리를 내린 명문 양반문벌의 기득권에서 나왔다. 이 부분을 무시하면 그는 역사 속에서 상상력을 발휘하는 한국인이 아니라, 역사를 초월하는 상상력을 가진 세계인, 더 정확히 말하면 외계인 내지 우주인이나 마찬가지가 된다. 덧붙인다면 요즈음 각 유적지에는, 우리들이 기억하는 그 선조들이 좋아했던 자연과는 동떨어진, 우주인들이 운석처럼 떨구고 간듯 느껴지는 크기만 하고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선조 기념표석들이 널려있다. 우리 선조 ‘아무개’를 기억하기보다 미래의 우주인 ‘아무개’를 기억하자는 듯이.
  연암 박지원은 집안의 문벌과 친구 관계가 최고 지도자들과 동일한 집단에 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자기 땅에 뿌리박는 일반 농민에 속한다는 입장에서 사회를 개혁해 보려 했고, 당시 한국인과 한국 사회에 필요한 발전은 항상 새로운 사물과 새로운 세계를 통해서 변화를 추구함으로써만이 얻을 수 있다는 진보주의적 학문 방향을 택함으로써 우리에게 중요한 문화적 자산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