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의 생애와, 그가 조선사회를 실질적으로 개혁하고자 한 내용
1.
정치적으로는, 사대부만이 자신의 욕구, 곧 창조력을 인정받는 특권층 사회를 일반 평민들 전체의 창조적 욕구가 반영되는
사회로 바꾸려고 했다. 경제적으로는 재산(땅)을 자와 못가진 자로 구분되는 지주와 소작인으로 2분된 토지소유 방식을 개혁하려고 했다.
사회적으로는 일등, 이등, 삼등 국민으로 나누어 차별하는 신분제 사회를 없애려고 했다. 문화적으로는 중국 일변도의 문물 교류에서 서양 제국과의
자유롭고 수준높은 문물 교류를 추진하려고 했다.
다산이 생각한 개혁의 주체는 보통 사람들이었다. 개혁을 이끄는 통치자는 이런
보통사람들로부터 추대된 것이라는 원론도 제시되어 있다. 하지만 개혁을 이끄는 통치자를 선발하는 방안은 나타나 있지 않다. 아마도 당시 정조
임금과 같은 스타일의 개혁적 통치자를 생각했던 것 같다. 이에 대해서 그는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기고 있었다.
“나는 정조임금에게 다른 사람은 짐작하기조차 어려운 지우를 받았다. 너희들은 임금에게 사랑받거나 임금을 기쁘게 하려 하지말고, 임금에게 공경받고 임금에게 신뢰받도록 하라.”
이는 권위적 통치의 유산이 강하게 남아있는 오늘 우리 사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책 결정권자와 그 아래 실무 집행자와의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금의 실태를 생각해 보면, 모두가 다시 음미해 보아야 할 교훈이 아닐 수 없다.
2.
인간적으로는, 다산의 모든 사상과 행동, 이 모든 것의 바탕엔 인간에 대한 나름의 깊은 성찰이 있었다. 이를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다산의 인간에 대한 생각은 대단히 독특하다. 또한 아직도 많은 논란이 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인정되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다산의 인간에 대한 생각은 ‘인간 본성은 착하다’고 하는 맹자의 성선설에서 출발하였다. 이에다가 인간과 동, 식물은
본성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서학(천주교)의 영혼론(생,각,령 성3품론) 및 인격적 하느님론을 수용하였다고 판단된다.
하지만
18세기 당시도 인간성에 대한 설명은, 이에서 출발한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가 정립한 4단7정론(四端七情論)이 기본
바탕이었다.
퇴계는 인간의 마음은 4단(仁義禮智) 또는 7정(喜怒哀樂哀惡慾)에 의해서 발현되는데, 4단으로 발현할 때 인간
본성을 지키는 순수한 선(善)이 되므로 이를 달성하기 위해서 계속 수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해서 율곡은 마음이 발현될 때는
반드시 7정이 앞서고 4단은 행동 뒤에 붙는 것이므로, 행동으로 4단을 성립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남인은 퇴계의 설, 서인은 율곡의 설을
따랐다.
그런데 다산은 본성의 수양을 강조한 점에서는 퇴계설을 따르면서도, ‘사람을 사랑하기 전에는 인(仁)이 성립되지
않는다’고 함으로써 행동을 중요시하는 율곡설의 장점 역시 인정하였다. 곧 인간성은 도덕 규범의 존재 자체보다 실천 행동에 의해서 이루어짐을
강조함으로써, 인식의 주체인 사람의 능동적이고 목적적인 실천 활동을 긍정했다. 본연으로 나타나는 인간성보다, 실천으로 나타나는 인간성을 강조한
것이었다.
3.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으로 사람을, 일반 백성을 사랑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 역시, 성악설에 근거한 법치론자가 아닌, 성선설에
근거한 덕치론자의 입장을 지켰다. 이 때문에 백성의 욕구를 제대로 반영하는 문제 해결 방안을 제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산은
천하의 일을 판단하는 데, 시비의 저울과 이해의 저울이라는 2가지 판단 기준이 있다고 하였다. 이에 따라서 사람도 4가지 부류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올바름으로 나아가 이익을 취하는 부류(守是而獲利), 올바름으로 나아가 손해를 취하는 부류(守是而取害), 잘못됨으로 나아가 이익을 취하는
부류(趨非而獲利), 잘못됨으로 나아가 손해를 취하는 부류가(趨非而取害) 그것이다.
사람은 ‘큰 인간(=어른, 군자)’이
되도록 자신을 수양하여, 백성을 위하는 행동을 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이 세상의 풍속과 교화를 진작시키기 위해서는, 1) 지위를 가진 인간의
체험[爵], 2) 나이를 먹은 인간의 체험[齒], 3) 도덕을 지키는 군자의 체험[德], 4) 세상이 향해 가는 도리를 아는 성인의 체험[道],
5) 하늘의 뜻이 표현되는 백성들 마음 속의 체험[天命, 民心]의 순서대로 중요성의 단계를 설정하고, 이러한 세상체험의 수준을 존중하고 깨닫도록
행동하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4.
다산이 이와 같은 생각을 펼쳐가는 도정에는, 세 사람과의 중요한 만남의 체험이 있었다. 첫째는 16세 때 현실개혁적 학문을
추구한 성호 이익을 성호선생문집을 통해서 만난 것이었다. 둘째는 23세 전후 시기에 서학적 소양에 밝은 이벽을 만난 것이었다. 셋째는 역사 같은
나이에 당시 사회를 바꾸어 놓겠다는 개혁 의지를 가진 정조를 만난 것이었다. 특히 군주인 정조와의 만남은 다산의 일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만남의 시작은 23세 때였다. 특히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생각이 일치한 첫 만남이어서 그 의미가 컸다. 실은 정조
임금과는 22세때 소과(진사) 합격후 사은 예식 중에 처음으로 직접 대면하였다. 하지만 정조와의 진정한 만남은 1784년(정조 8년) 여름,
글을 통한 대면으로 시작되었다.
정조는 성균관 유생들에게 자신이 동양의 고전인 <<중용(中庸)>>을 직접
읽고서 생긴 의문점 70조를 내려 주고, 이에 대한 유생들의 답변을 요구하였다. 의문점은 대체로 인간의 본성, 인간성의 선악(善惡) 여부,
이상적인 인간인 군자(君子)의 의미 같은 주제들이었다. 요컨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대한 답변을 요구한
것이었다.
다산은 가장 친한 친우로서 서양학까지 포함하는 폭넓은 독서를 한 이벽(李檗, 호 曠菴, 큰형 丁若鉉의 처남)과
의논하여, 퇴계 이황과 율곡 이이를 위시한 이전 학자들의 견해를 절충하여 이 질문에 대한 답안을 만들어 바쳤다, 수일 후 정조는 국왕의 세미나인
경연 석상에서 도승지 김상집(金尙集)을 위시한 신하들에게 정약용의 견해만이 특이하여 일반적인 속설을 수준을 벗어났으면서도 그 견해가 명확하고
적절한 귀중한 답안이라고 극찬하였다.
당시 정조는 <<사칠속편(四七續編)>>이라는 ‘인간성론’에 대한
저술을 써놓았었는데, 측근들 조차 그 사실을 제대로 알지 못하였다. 정약용 역시 후일에야 정조의 이 저술과 자신이 제출한 답변의 방향이 상당
부분 일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다산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하는 답변을 본질주의 정신에 입각한 조화 추구라는 방향에서 제출한
것이었는데, 바로 이 점이 정조의 속 마음과 그대로 합치했던 것이다.
곧 정조와 다산은 ‘인간’에 대한 생각이 같다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강렬한 첫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밖에도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죽은 해에 태어난 인재라는 점도 중요한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5.
다산은 정조 탕평책의 적극적인 지지자였을 뿐 아니라, 당시의 본질주의적 정치체제론을 지원한 정치가이기도 했다. 다산의
초기 저술인 탕론(湯論), 원정(原政), 원목(原牧), 전론(田論) 등에 이러한 점이 잘 나타나 있다. 정치적으로는 백성을 위해 존재하는
통치자와 균등한 처지의 백성(均民), 경제적으로는 경작자에게 토지를 분배한다는 원칙(耕者有田)에 입각한 토지제도 실시 원칙, 학문적으로는
육경고학에 나타나 있는 정신을 원론적 입장에서 본질주의적으로 적용해볼 때 나타날 수 있는 이론이다. 이러한 글들은 모두 정조의 인정을 받은
시기에 쓰여진 글들이다. 곧 당시, 정약용이 정조에겐 그의 교육방향, 인재 양성의 방향에 잘 들어맞는 사람이었다.
최근
세계적인 무한경쟁 시대가 강조되면서, 인간을 키워내는 우리 사회의 교육이 실용주의 정신, 심하면 기능주의 정신 일변도에서만 인간을 교육하자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이상주의 정신이나 진보주의 정신, 본질주의 정신에 입각한 방향은 거론조차 제대로 할 수 없는 실정이
되었다. 하지만 실용주의로만 모든 것이 해결되는가? 어떠한 정신을 채택해야 정말로 미래를 창의적으로 이끌어 가고, 모든 사람들의 보편적 욕구를
추출, 통합하여 반영할 수 있는 인재가 양성되는 진정한 교육 입국이 가능한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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