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약전(丁若銓)은 정약용의 둘째 형입니다.
1758년 경기도 광주 마재에서 출생하여, 1816년 유배지인 전남 흑산도에서 사망하였습니다. 그는 유배 중임에도
불구하고 흑산도 바다에 사는 어류를 위사한 여러 생물들을 조사하여 분류한 '자산어보(玆山魚譜)'를 저술한 실학자로 특히 유명하지요. 호가
손암(巽菴)입니다. 그의 편지글과 '자산역간(玆山易柬)' '손암예의(巽菴禮疑)' 같은 약간의 저술이 정약용이 자신의 문집에 수집해 놓아서 세상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정약전은 19세 전후에 녹암 권철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이승훈, 이윤하, 김원성 등과 함께 공부하였는데,
다산 정약용에게는 성호의 학문을 전수해 준 선배 역할을 하였습니다.
다산은 형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어려서는 얽매이지 않으려는 성격이었고 커서는 사나운 말이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듯 하였지만, 서울에서 지내면서 넓게 듣고 뜻을 높게 하였다.” 이러한 그의 성격이 시류에 영합하지 않고 자신의 양심을 지키면서 살아간
실학자로서의 면모를 지켜내게 했던 것이죠. 한편, 당시 권철신은 양명학에 몰두해 있었으므로, 정약전 역시 양명학을 공부했다고 보는 연구자도
있습니다.
2.
정약전은 1790년 여름 왕자(순조) 탄생을 기리는 과거시험인 증광별시에 합격하였는데, 막내동생인 다산이 과거에 합격한 다음
해입니다. 이후 벼슬이 병조 좌랑에 이르렀습니다. 1795년 중국인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려다 놓친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목만중 등의 공격을 받아
어려운 처지에 빠지기도 했으나, 1798년에는 정조의 명을 받고, '영남인물고' 편찬에 참여하기도 하였습니다. '영남인물고'는 지금도
경상도 자방 남인 계열 인물들을 파악하는 기본 사료에 해당합니다.
또한 정약전은 1784년 전후에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친우 이승훈과 함께 적극적인 서학실천 운동도 벌였습니다. 그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전수받은 사람은 동생인 정약종과 외종인 윤지충, 역관
최창현인데, 이들 모두는 정조년간 천주교회를 이끈 기둥이자 저명한 순교자들입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조상제사 금지 문제로 인하여, 진산사건 이후
천주교와 결별했다고 판단됩니다. 실제로 유배 중에 자손들에게 유학에 몰두할 것을 권하고 있는 서간문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국 신유교난 때
천주교를 신봉했다는 죄목으로 전라도 신지도에 유배되었다가, 황사영백서 사건으로 다시 흑산도로 유배되었죠.
3.
정약전은 천주교 뿐 아니라 서양의 자연관념인 4행설이나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포함하는 천문학, 동양과 서양의
역수학(曆數學)과 유크리드 기하학을 위시한 자연과학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러한 자연과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1805년부터 10년
동안의 관찰과 정리작업을 통하여 바다 생물에 관한 연구서적인 '자산어보'를 완성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결국 이용후생을 목적으로 하는
박물학자로서의 면모가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요즈음 '자산어보'를'현산어보'로 부르자는 주장도 있지만, 이는 신기한 학설을
만들려는 호기심의 산물일 뿐, 큰 의미는 없다고 봅니다.
'자산어보'는 바다 생물들을 비늘있는 종류(鱗類), 비늘없는 종류(無鱗類), 조개 종류(介類), 물새나 해초 같은 기타 종류(雜類)로 분류하였습니다. 각 생물들의 크기, 생김새, 색깔, 습성 등을 자세하게 기록하였고, 특히 생선의 경우는 잡히는 시기 및 해마다 변화하고 있는 어황 등을 기록해 놓기까지 하였습니다.
한편 흑산도에서 특히 유명한 썩인 홍어 같은 경우, 복결병(腹結病)을 고치고 술 기운을 없애는 데 효과가 있을 뿐 아니라, 흑산도에 특히 많아 사는 뱀이 집안에 들어오지 않게 하는 효과도 있음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바로 당시 일반인들이 홍어를 실생활에 어떻게 사용했는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기록이죠. 동시에 바다 생물을 기록해 놓은 중국의 여러 고전과 대비하면서 그 차이점을 살펴 기록해 놓기도 했습니다.
4.
정약전은 이러한 노력을 하는 이유를 “후세의 선비가 이를 고쳐 완전하게 하면 이 책은 병을 고치고
이롭게 쓰는데, 그리고 이치를 탐구하는 집안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라고 썼습니다.
이렇게 인간의 실제 생활에 접하여 이를 관찰하여 실질적인 도움이 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실학 정신의 핵심이죠. 이러한
정신이 그의 생각을 멈추지 않게 만든 원동력이었던 겁니다.
한편 이러한 정신을 그를 보통 섬사람들과 친하게 지내게 만들기도
했죠.
“상스러운 어부들이나 천한 사람들과 패거리가 되어 친하게 지내며 다시는 귀한 신분으로서의 교만을 부리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섬사람들이 기뻐하여 서로 싸우기까지 하면서 자기 집에만 있어달라고 하였다.”
이렇게 일반 평민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었던 정약전은 당연히 사회개혁론자이었습니다. 이는 정약용과 마찬가지로 성호 이익, 그리고 청남 정파의 입장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특히 군현제가 백성의 삶을 끌어올렸으므로 봉건제보다 낫다고 주장한 부분에서 읽어낼 수 있습니다. 명말청초 경세학파의 사회개혁론의 발상과 같은 근대적 민권의식이 보여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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