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양도면 하일리에 있는 정제두 묘소의 문인석상>
간략한 전기
하곡 정제두(霞谷 鄭齊斗)는 인조 27년(1649)에 태어나 영조 12년(1736)에 돌아가신 양명학자(陽明學者)이다. 서울
출신으로, 본관은 영일(迎日)이다. 할아버지는 우의정 정유성(鄭維成), 아버지는 진사 정상징(鄭尙徵)이다. 어머니는 호조판서 이기조(李基祚)의
딸이다. 이상익(李尙翊), 박세채(朴世采), 윤증(尹拯)에게서 배웠다. 초기 양명학자로 지칭되는 최명길(崔鳴吉)의 형 래길(來吉)의
외손서(外孫壻)이다.
정제두의 생애 초반기는 정치적으로는 비교적 평화로왔던 서인-남인 붕당 공존기였으나, 사회, 사상적으로는
어려운 시기였다. 중국대륙의 명(明)나라가 청(淸)나라에게 무너지는 와중에서, 조선도 두 차례 호란을 당한 후유증 때문이었다. 생애 중반 이후는
정치, 사회, 사상적으로 모두 어려운 격렬한 당쟁기였다. 특히 숙종-경종년간 당쟁은 학문, 문벌, 지역의 이해 차이 때문에 서로 죽이고 살리는
데 이르렀고, 지역, 직업에 매인 일반 서민들까지도 연루되었던 격렬한 내부 분열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제두는 스승이었던
소론 붕당의 영수 윤증과 같은 처신으로 일생을 살아감으로써 당대에 큰 존경을 받았다. 곧 대대로 수많은 고위관료를 배출한 명문
세가대족(勢家大族)이지만, 스스로 세상에 대한 처세가 궁하기 짝이 없는 사람인 궁인(窮人)으로 자처해 살아가면서, 학문과 도덕의 완성, 그리고
가족과 스스로 찾아오는 제자 교육에 전념한 산림(山林) 학자였다(固窮處約在 先生不過爲一事. '遺事')
정제두는 말년에
주자성리학으로 전환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18세기 초는 주자학자와 양명학자가 서로 반성하는 입장에서 교류했던 17세기 중반
명말청초 황종희(黃宗羲), 고염무(顧炎武) 이래 경세학풍(經世學風)을 수용하는 분위기가 있었음을 보다 적극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있다.
실리(實理)와 생리(生理)를 강조
정제두의 양명학 이해는 대체로 '존언(存言)'에 정리되어 있다. 그는 “사물의 이치와 나의 마음을 어찌 안과 바깥, 저것과
이것으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왕양명의 이른바 ‘내 마음 속에 있는 만사의 이치요 천지, 만물의 이치는 하나일 따름’이라 한 것이 바로 이를
말함입니다”라 하여 양명학의 심즉리(心卽理)설을 받아들였다.
동시에 정제두는 우주만물과 인간의 마음에 내재하는 이치란 살아
있는 이치인 생리(生理)라고 보았다. 이는 태극과 음양의 동정(動靜)은 결국 생생(生生)하여 쉬지 않듯이, 온 우주는 살아있음(生)으로 충만해
있다고 본 데서 연유한다.
그는 ‘이와 기는 나누어서 말할 수 없다’ 하여, 이기이원론적인 주자의 이기론보다는 일원론적인
왕양명의 이기론을 수용하였다. 하지만 양명학의 심즉리설을 이기(理氣)의 체용(體用)론으로 설명하고도 있다. “이의 체는 심의 체를 낳으니, 심의
용은 이의 체이다. 심에 용이 없으면 이에는 체가 없다. 이에 체가 없으면 심에는 용이 없다. 이는 곧 심이고 심은 곧 이이다('存言'
耳目口鼻說)”라 한 것이다.
정제두는 이와 기를 근원적인 면에서나 실제적인 면에서나 분리할 수 없는 일체로 파악한 것이다.
이를 기보다 선차적 존재로 보는 주자성리학의 입장도 보이고 있는데, 당시 조선에 보편적이었던 주자학을 양명학의 이론 정립에 원용한 때문일
것이다.
정제두의 이러한 설명을 따르면, 천리(天理)는 존재하기만 하는 처리(處理)에서부터 세상에 실재하는 실리(實理)로
변화된다. 이러한 실리는 정제두에게는 살아있는 이치(生理)로 보다 구체화된다.
“실제 형세(勢)로 나타나는 이치로 보면, 죽은
나무나 불타서 남은 재도 또한 ‘이’이고, 도적이나 난리도 또한 ‘이’이다. '죽은 나무와 불타서 남은 재, 도적과 난리는, 살아있고 죽어있음,
진실하고 망녕됨이 같지 않다('存言' 睿昭明睿說)”고 하여, 인간 세상의 복잡다단한 변화 때문에, 성인-범인들을 살게 하는 이(生理)가 존재하는
반면에, 고목이나 재처럼 죽은 이(死理)도 나타나고, 도적-악인들을 살게 하는 망녕되거나 퇴락한 이(妄理, 頹理)도 나타난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모든 이 중에서 생리를 잡고, 생리 가운데서 진리를 택해야, 이(理)라 할 수 있다('存言' 生理虛勢說)”고
하였다. 결국 이치란 현재 실사구시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이치(生理)이므로, 만세통법도 곧 세상 사람과 만물이 살아가게 하는 이치라는
것이다.
양지(良知)와 자심(自心)
정제두에게서는 “무릇 나에게 있는 사단(四端)이란 것이 곧 양지이다.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으나, 살피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바로 이를 알아서, 양지를 키워 충만하게 함이 지에 이른다(致知)는 것이다”는 정도의 치양지(致良知)설 설명을 찾을 수 있다. 결국 정제두가
말하는 양지는 곧 실리=생리임을 깨닫게 하는 자기 마음 속에 내재하는 지혜를 말한다.
정제두에게서 비롯된 조선 양명학풍의
특징에 대해 위당 정인보는 '양명학연론'에서, ‘실제 마음으로 사적인 계산을 극복하고, 실제 학문으로 가짜 습속이 판치는 것을 없앤다’는 실제
행동을 지향하는 철학이 양명학이니, 우리 마음의 타고난 본바탕대로 조그만 자기 속임수도 없이 살아가려는 공부라고 정리하였다.
“그러므로 내 양명학을 말하되 누구나 양명학을 좋다고 하는 선입견을 가지고 이에 긍인(肯認)함을 바라지 아니한다. 반드시 자심(自心)으로 좇아
진시진비(眞是眞非)의 분별이 스스로 갈라져야 비로소 허가권(虛假圈)을 벗어나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정인보, 안재홍,
최익한들이 1930년대 조선학 운동기에 스스로 사용했던 ‘실학’이란 용어는, 허식과 가장을 배격하고 스스로 성실하고 참되기를 희구하는, 학문하는
사람으로서의 몸가짐에서 시작된다. 경세론 역시 민생과 사회의 어려움을 ‘자기 마음’에 참을 수 없어 그 개선을 추구하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동아시아 역사 체험에서 본다면, 주자성리학은 중국인 국가인 남송이 거란, 여진, 몽고족의 잇따른 침략으로 반쪽 난
상황인데다, 그나마 지켜내기 힘든 상황에서, ‘부득이하여 원통함을 머금어 참는다(含怨忍痛迫不得已)’고 외치면서 중화국가를 지켜내자는 철학이었다.
곧 문화적 자존심만으로도 중화를 지켜낼 수 있다는 사대부 가문의 지사(志士)로서의 자존심을 받쳐주는 주는 철학이었다.
반면에
양명학은 중국족의 명나라가 성립하여 중화의 자존심이 회복된 상황에서, 지사와는 또 다르게, 시대 변화를 따라가면서 중화라는 통일중국을 지켜나가는
대장부(大丈夫)로서 자신을 속이지 않고 현실세계를 실사구시적으로 품어안고 가는 자존심을 일깨우려는 철학이었다.
정제두 당시
조선 당쟁기든지 정인보 당시 일제 침략기든지, 사람들이 원통함을 이겨내려는 지사로서의 삶이 더 필요한지, 시대변화에 따라 자신을 속이지 않는
대장부로서의 삶이 더 필요한지 하는 선택을 놓고 고심할 때, 정제두에서 비롯된 조선 양명학은 스스로 마음을 다잡는 ‘자심(自心)’이라는
대장부로서의 삶의 철학을 제시했던 것이다.
친민(親民)과 탕평(蕩平)
양명학의 사회사상은 '대학'의 장구를 ‘신민(新民)’ 아닌 ‘친민(親民)’으로 읽어야 한다는 데서 출발한다. 정제두 역시
친민으로 읽어야 한다고 보아서, “백성을 친하여 천하 사람으로 하여금 다 그 명덕(明德)을 밝히게 하는 데까지 이르면, 그 체용과 본말의
온전함이 이에서 더 큰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였다.
주자성리학의 ‘백성을 새롭게 한다’는 ‘신민’은, 백성들은 보다
분수가 뛰어난 사대부들이 수양하여 얻은 도덕-이치로써 통치-교화를 받는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다. 반면에 양명학의 ‘백성과 친한다’는 ‘친민’은
사대부와 백성은 모두 마음 안에 도덕-이치를 동일하게 갖고 있다고 본다. 다만 이를 수양하지 않으면 완전히 잃게 된다 하여, 사대부와 백성
모두를 도덕 실천의 주체자로 파악하였다. 이 주장이 대동사회를 지향하는 경세학풍과 연결되면, 사대부 세습제 반대로 나타난다. 인간은 ‘양지’와
타고난 능력이 모두 같으므로, 사대부와 일반인의 나뉨(分)을 절대적인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정제두 역시 사, 농,
공, 상 4민의 기본적인 평등을 내세웠다. 모든 일의 근본은 한가지이므로, 모두 자기의 생업에 종사하되, 놀고 먹는 자는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임금도 하나, 백성도 하나’이므로 ‘양반이 나라와 더불어 인민의 권력을 아우르는 것’은 천하의 이치가 아니라 하였다. 따라서 관로를 좁혀
어진 이를 택해 오랫동안 재임하도록 하며, 대대로 계승되지 못하게 하고, 관직에 있지 않은 양반은 농사를 짓게 하자고 하였다. ‘관직이 없는
양반을 없게 한다(無無官兩班)’는 주장이었다. 그렇게 30년 시행하면 붕당이 드물어지고, 50년 지나면 붕당이 소멸되듯이 양반도 소멸될 것으로
보았다.
토지소유는 균전(均田)제를 옳다고 보았지만, 현실적으로는 한전(限田)제로써 이루고자 하였다. 토지보유 한계를 호당
3결로 제한하고, 3결이 넘으면 관에서 사는 등 국가의 개입을 통해 균전의 이상을 실현하자는 방안이었다. 당시 당면과제였던 군역 문제는, 양인
이상이면 누구나 평등하게 포를 내도록 하자는 호포제를 주장하였고, 양천 구별 없이 납포하는 정포제까지 구상하고 있었다.
이러한
제도 개혁을 실현하는 주체로서는 군주-재상을 설정함으로써, 군주제 옹호라는 시대적 한계를 넘어서지는 못하였다. 군주는 어떤 분수를 가지고
있든지, 스스로 노력하여 성학(聖學)을 이룸으로써, 이익집단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붕당을 타파하고 탕평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이 정제두의
생각이었다.
곧 강화도에 은둔하여 사는 학자로 일관했다 해서, 정제두가 정치적 행위 자체를 치지도외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1728년 전국적인 반란인 무신란을 제일 먼저 영조에게 알린 최규서(崔奎瑞)와 함께, 국가적 변란임을 인지하자마자 곧바로 도성에
들어왔다.
반란 평정 직후에는 영조와 대담하면서, 앞으로 본격 실시할 탕평(蕩平)정치의 원칙으로서, 집착을 피하고 때에 맞추는
중도 노선인 '시중(時中)'을 추구함이 바로 '정일지중(精一之中)'으로 가는 현실적인 길이라는 입장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영조가 실제로 적용할
구체적 방도를 묻자, 하나의 의리로써 당론을 타파해야한다는 원칙론을 바탕으로 성학(聖學)을 공부하면서, 구체적인 시행은 대신들과 상의해서
결정하면 된다고 하였다. 현실정치에 직접 개입하는 상황은 피했던 것이다.
정치의 주체자는 군주만이 아니라 대신(宰相)이기도
하다는 고언을 들은 영조는, 이후 보다 재상권을 강화하는 바탕에서 탕평책을 추진하였고, 정제두 또한 영조 정권 안정의 공로자로 예우받았다.
무신란 평정에 공을 세운 이보혁(李普赫)은 정제두의 제자였고, 아들 정후일과 사돈 관계이기도 하다.
후세에 미친 영향
정제두에게서 시작된 조선 양명학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본성에 충실하면서 끊임없이 마음을 바르게 잡아, 스스로 본바탕에 입각한
올바른 자아를 확립하자는 내용이(專內實己) 그 핵심이다. 학설의 묵수보다, 왕양명이 말한 바 “내 안에 있는 내가 주인이 되어 외부세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 전통은 외세의 국권침탈로 새로운 민족의 방향을 모색하던 시기에 재평가되어, 정원하, 이상설, 이회영
같은 민족운동가들의 정신과 행적, 1930년대 조선학운동에서 이어지는 ‘실학’ 정신들을 바탕으로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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