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복음 묵상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써니2022 2007. 7. 17. 16:30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루카 복음> 10,25-37  

   그때에 25 어떤 율법 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2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27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8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29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렸다.

31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2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34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35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 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36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 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1.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내 이웃’이란, 누구에게 물어도 꼭 같았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에게 ‘이웃’이란 바로 ‘이방인을 뺀 모든 동포(同胞)’ 곧 유대인들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합니다.
   사실 신분제 사회나 계급제 사회였던 전근대사회에서는, ‘내 이웃’이란 대체로 ‘내 동포’ ‘내 동족’을 의미합니다.

   ‘내 동포’는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전통적으로는 ‘한 핏즐’을 말합니다. 하지만 이는 보통사람들('양인 良人' 이상)에게 적용되는 것이었습니다. 전근대 조선사회에서도 핏줄이 다르다고 지목된 백정을 위시한 천인(賤人)들은 ‘내 이웃’=‘내 동포’에서 사실상 제외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한국인들과 생각이 좀 다릅니다. 유대인들에게 ‘내 동포’란, 아브라함 이래 '하느님과 계약을 맺은 (같은 종교로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우리와 몇 천년을 이웃에서 맞대고 사는 중국인들도 한국인들과 생각이 좀 다릅니다. 중국인들에게 ‘내 동포’란 한자(漢字) 사용, 인(仁=惻隱之心)과 의(義=羞惡之心)를 존중하는 인간들, 특히 중국 전체를 한 몸으로 포용할 수 있는 대장부(大丈夫)를 지향하는 ‘중화문화’를 받아들이는 (같은 중화문화로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지금 북한 사람들도 지금은 우리와 아주 많이 다릅니다. 남한 사람들은 동포를 ‘한 핏줄’이라고 쉽게들 생각하지만, 북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김일성 민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곧 북한 사람들에게 ‘동포’란, 바로 ‘김일성의 혁명전통을 알고 받아들이는 (같은 이념으로 사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미 2000년 전에, 이러한 ‘내 동포’에 해당하는 ‘내 이웃’을, 하느님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유대인에게 자비를 베푼 이방인인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어, 하느님의 계약은 '이 세상에서 하느님의 자비를 알고 실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고 깨우쳐 가르치심으로써. 우리들의 좁은 '이웃' 개념을 하느님의 넓은 '이웃'개념으로, 곧 ‘사해 동포’ = ‘모든 사람들’로 바꾸어 놓으셨습니다.

   우리 '한 핏줄'을 특히 좋아하는 대한민국 사람들이나, 김일성 혁명전통을 금과옥조로 받드는 북한 사람들이나, ‘한 핏줄’ 또는 ‘한 이념’이라는 '이웃=동포' 개념을 훌쩍 넘어서서... 예수님의 ‘내 이웃’ 개념을 그대로 받아들이려면... 정말로 한참 멀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대한민국에 사시면서 복음 말씀을 받아들이신다는 상당수의 크리스찬님들도 아마 대체로 같으실 겁니다.)

 

  2.
  착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는 ‘누가 내 이웃인가’를 묻는 대신에, ‘(이 세상 사람들에게) 누가 이웃이 되어 주는가? 곧 어떻게 이 세상 사람들의 이웃이 될 수 있는가?’ 하고 바꾸어 묻고 있습니다.
  그 출발점은, 루가 복음 구절에 의하면,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곧 예수님, 하느님과 꼭 같이... 모든 인류에게로 확대되어 가는 자비의 ‘눈길’입니다. 그건 인간들의 무엇을 보아서였을까요? 아마도 인간의 자기폐쇄적인 죄와 생명의 고난을, 인간 공동체의 자기폐쇄적인 불의와 생명의 불평등을 보아서였을 것입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하느님의 자비가 어떻게 사람들에게 다가가는지를 잘 설명한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첫째 다가감은,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둘째 다가감은,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셋째 다가감은,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 갚아드리겠습니다’

  이를 몰트만이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와 그의 자비의 능력>에서 말한 ‘온 삼위일체의 자비’를 가지고 설명한다면,
  첫째는 성부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근심을 말합니다.
  둘째는 성자 예수님의 인간 세상에서의 죽음을 통한 구속 사업을 말합니다.
  셋째는 성령 하느님의 구속 사업을 마칠 때까지의 인내(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의 탄식과 바람과 기다림)를 말합니다.

  이를 하느님의 눈길, 하느님의 손길, 하느님의 마음길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3.
   2007년 7월 14일 말씀터의 주일복음 나눔에서도...
   설령 우리 교우들이 ‘내 이웃’을 예수님 마음처럼 ‘사해 동포’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해도, 우리 대한민국에서 흑인을 양자로 받아들일 사회적 바탕이 되어 있을까? 외국인을 한 핏줄을 넘어서는 ‘내 이웃’으로 대하는 사회적 바탕이 되어 있을까? 하는 부분들이 많이 나누어졌습니다.
   특히 프랑스 여행에서 느낀 토착화된 크리스찬 공동체와 그렇지 못한 우리 공동체와의 문화적 차이들, 예컨대 프랑스 인들은 오랫동안 보이지 않았던 거지의 경우 대체로 누구든지 그 거지의 건강을 걱정하여 그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들을 보았다든지, 이번 비오 사제 서품식-첫미사에 참석하려고 내한한 프랑스 너빌 성당의 교우이자 CEO 출신인 파스칼 부부는 나이지리아 출신 흑인 아이를 양자로 삼고 무척 아낀다든지 하는 내용 등등과 함께.

   곧 한 개인이 옳다고 여겨서 행동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할 수 있는 모티브가 필요한데, 이 모티브가 한국 사회에서는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사실, 곧 선의라 해도 이런 저런 공동체적 제약이 많아서 쉽게 받기 어렵다거나, 남에 일에 개입한 결과가 별로 좋을 수 없는 사회공동체의 분위기라든지, 불의가 횡행하는 세상의 눈이 워낙 어려워서 피해갈 수밖에 없다든지 하는 데 대한 탄식들이 많았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 개인이 할 수 있는 사랑의 단계를 생각해 보니 대체로 4단계가 있는데, 먼저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그 다음에 가족을 사랑할 수 있고, 그 다음에 친지들을 사랑할 수 있고, 그 다음 단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모르는 이웃들=사람들까지도 사랑할 수 있다고 느꼈다는  나눔들이 있었습니다.

 


  4. 참고 자료

1) 중국 북송의 장재(장횡거)는 그의 대표작으로 인정되는 묵상 글인 <서명(西銘)>에서 “백성은 나와 한 핏줄(동포)이요, 사물은 내 곁에 있는 친구이다(民吾同胞 物吾與也)”라고 말하였습니다. 정이천과 주자가 이를 높이 평가한 이후부터, 세상의 선비들이라면 누구나 암송하고 명상하는 장횡거의 이 유명한 구절이, 바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구절과 잘 대응된다고 봅니다.
  이 구절은, 실은, <<맹자(孟子)>> <양혜왕장구 하(梁惠王章句下)>에서 사람들은 환과고독(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 노인, 鰥[홀아비 환], 寡[적을 과], 孤[외로울 고], 獨[홀로 독]), 곧 (사회공동체에서) 돌아보는 사람이 없는 자를 잘 돌봐야 한다는 말에 대한 묵상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조선왕조의 사회복지 사업은, 과부와 노인에게 주로 집중되어 있기는 했느나, 대체로 이 네 부류를 대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특히 18세기 영조 임금과 정조 임금은 ‘백성은 나의 동포’임을 말하고 싶으면, ‘홀아비, 과부, 고아, 독거노인(환과고독)이 바로 나와 한 핏줄‘임을 진정 행동으로 보이도록 하자고 거듭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2) ‘자비의 눈길’, 곧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는 구절은 베네딕트 16세께서 교황으로 처음 맞이하신 사순절 때 ‘사순절은 자비의 샘이신 주님께 나아가는 내적 순례를 위한 특별한 시간입니다’ 라고 하시면서 직접 택하신 성경 구절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기쁨과 평화와 사랑을 갈구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울부짖음을 듣고 계십니다. 여느 시대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버림받았다고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 어른, 노인을 가리지 않고 괴롭히는 불행과 외로움, 폭력과 굶주림의 비참함 속에서도, 하느님께서는 어둠이 세력을 떨치도록 두지 않으십니다. 사랑하는 저의 선임자이신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말씀하셨듯이, '악에는 하느님께서 부여하신 한계'가 있으니, 그것은 곧 (*필자 주 : 약자나 괴로워하는 자에 대한 인정 or 접근->용서 or 포용->친절 or 시혜, 곧) 자비입니다(Memory and Identity, 19면 이하). 저는 이러한 생각을 염두에 두고 올해 사순 시기 담화의 주제로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마태 9,36)라는 복음 말씀을 골랐습니다.”

3) 자비(慈悲) : 원래 불교 용어로서, 산스크리트어를 한자로 의역한 것입니다.
  자(慈)는 산스크리트의 마이트리maitri(우정)에 해당하는 말로 깊은 자애심을 가리키고, 비(悲)는 카루나 karuna(동정)에 해당하는 말로 깊은 동정심, 즉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리킨다. 불전(佛典)에서는 살아 있는 모든 것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것(與樂)이 자(慈)이고, 불행을 없애주는 것(拔苦)을 비(悲)라고 말하지만(<<大智度論>>), 자와 비는 거의 같은 심정을 나타내며 마이트리 또는 카루나라는 원어만으로 <자비>라고 번역되는 경우도 많다. 대자대비(大慈大悲), 대자비라고 말할 때는 부처나 보살의 자비를 나타냅니다.

4) 몰트만, <어머니와 같은 아버지와 그의 자비의 능력>
  우리가 죄의 자기폐쇄성으로부터 해방받은 것과 고난으로부터 구원받은 것은 온 삼위일체의 자비로부터, 즉 아들의 죽음으로부터, 아버지의 근심으로부터 그리고 영의 인내로부터 연유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삼위일체 하느님은 그의 세상의 숙명에 개입하고, 그의 피조물들을 그의 은밀한 사랑의 생명 안으로 받아들이며, 이들에게 그의 영원한 생명을 나누어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고난 당하고 자비를 베푸는 그의 사랑을 통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해방시킵니다. 하느님다운 것은 자비이지, 가부장주의가 말하듯이, 권능과 초능력, 전능이 아닙니다. 이 자비는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이러한 의미에서 전능합니다.